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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목소리

외통 2023. 2. 24.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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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목소리


“오늘 저녁에 출장을 갈 것 같아. 내일 일 끝나는 대로 바로 올라갈게.”
그 길로 만감이 교차한다.

모처럼 늦게까지 남아서 야근을 할까.
집에 밀린 빨래도 있는데,
모처럼 친구들 만나서 술이나 한잔할까?
싱글인 친구 집에 오라고 해서 밤새 수다나 떨까?
친정에 가서 저녁도 얻어먹고 반찬도 좀 챙겨올까?’

가뭄에 콩 나듯이 찾아오는 남편의 출장. 머릿속엔 순간적으로 많은 생각들이 오가고 휴대전화기에 저장된 지인들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곱씹어본다.

아줌마가 되면서 크게 달라진 것 중 하나는 퇴근 시간 후의 생활이다.

늘 ‘누구를 만날까, 만나서 어디를 갈까’가 가장 주된 생활의 물음들이었다면 이제는 무엇을 해 먹을까.

냉장고에는 뭐가 남아있나가 주된 관심이요, 고민거리가 되었다.

맞벌이 부부로 살아가면서 퇴근 후에 누군가를 만나서 느긋한 시간을 보내기란 쉽지 않다.

아이가 있다면 더 그럴 것이다. 아이는 없지만, 내가 늦으면 집에 먼저 들어와서는 “때는 이때다”며 자유롭게 집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라면을 끓여 먹으면서 양말을 벗어 소파 아래 밀어놓고 있을 남편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평일 저녁의 약속은 특별한 일이 아니고는 미루던 나다.

뿐인가. 평일의 저녁 시간은 하루 중 유일하게 남편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는 시간이기에 되도록 함께하려고 한다.

이러한 노력을 방해하는 큰 산이 있으니 바로 퇴근 시간. ‘ 땡’ 하기가 무섭게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는 나를 보고 혹시나 누군가 ‘역시 아줌마들은 어쩔 수 없어’ 하며 혀를 끌끌 차지는 않을까 하는 괜한 염려와 내일을 기약하는 작별 인사를 뒤로하고 나가는 뒤통수로 날아오는 누군가의 따끔한 시선은 늘 마음의 걸림돌이다.

그런데 오늘 남편이 출장을 간다.

오늘 저녁에는 뭘 해 먹을지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직원들의 눈치를 보며 땡 퇴근하지 않아도 된다.

가정과 직장에서 2중으로 눈치를 봐야 했던 내게는 작은 호사를 부려볼 수 있는 시간이다.

그날 저녁 친구들과 가볍게 술 한잔을 하던 중 휴대전화기를 만지작거리며 혹시라도 걸려오는 전화를 받지 못할까? 테이블 위의 휴대전화기를 주시하고 있는 나를 보고 친구들은 “남편 출장 갔다며?”라고 묻는다.

어쩌면 남편의 출장을 즐기기보다는 그날은 꼭 여유롭게 즐겨야만 한다는 생각이 나를 더 자유롭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닐지,

좋은 이들과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정말 한 남자의 아내가 된 것인가.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남편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일찍 들어오라는 마누라의 짜증 섞인 전화를 받지 않아도 되고, 아침까지 술을 마셔도 씻지 않고 잘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일의 연장이겠지만, 어쩌면 나보다 더 짜릿한 출장 휴가(?)를 즐기고 있을지도 모를 그이. 휴대전화기 저편으로 들려오는 술에 취한 듯한 남편의 목소리가 짜증스럽기보다는 안쓰럽고 미안하기까지 한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반딧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