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일생은 기쁨과 슬픔을 경위(經緯)로 하여 짜가는 한 조각의 비단일 것 같다. 기쁨만으로 일생을 보내는 사람도 없고 슬픔만으로 평생을 지내는 사람도 없다. 기쁘기만 한 듯이 보이는 사람의 흉중(胸中)에도 슬픔이 깃들이며, 슬프게만 보이는 사람의 눈에도 기쁜 웃음이 빛날 때가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기쁘다 해서 그것에만 도취(陶醉)될 것도 아니며, 슬프다 해서 절망만 일삼을 것도 아니다.
나는 지금, 내 책상 앞에 걸려 있는 그림을 보고 있다. 고흐가 그린 <들에서 돌아오는 농가족(農家族)>이다. 푸른 하늘에는 흰 구름이 얇게 무늬 지고, 넓은 들에는 추수(秋收)할 곡식이 그득한데, 젊은 아내는 바구니를 든 채 나귀를 타고, 남편인 농부는 포크를 메고 그 뒤를 따라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생활하는 사람의 세계를 그린 그림 가운데 이보다 더 평화로운 정경(情景)을 그린 것은 그리 흔하지 않을 것이다.
넓은 들 한가운데 마주 서서, 은은한 저녁 종소리를 들으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농부 내외의 경건한 모습을 우리는 밀레의 <만종(晩鐘)>에서 보거니와,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그림은 그다음 장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밀레와 고흐의 가슴 속에 흐르고 있는 평화지향(平和志向)의 사상은 마치 한 셈에서 솟아나는 물처럼 구별할 수 없다.
그 무서운 가난과 고뇌(苦惱) 속에서 어쩌면 이렇게도 모든 사람의 가슴을 가라앉힐 수 있는 평화경(平和境)이 창조될 수 있었을까? 신비로운 일이다. 베토벤의 <전원교향곡(田園交響曲)>이나 <봄의 소나타>를 들을 때도 나는 이러한 신비를 느낀다. 둘 다 베토벤이 청각장애인이 된 이후의 작품이다. 슬픔은, 아니 슬픔이야말로 참으로 인간이 그 영혼을 정화(淨化)하고 높고 맑은 세계를 창조하는 힘이 아닐까? 예수 자신이 한없는 비애(悲哀)의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인류의 가슴을 덮은 검은 하늘을 어떻게 개게 할 수 있을 것인가? 공자(孔子)도 석가(釋迦)도 다 그런 분들이다.
나의 막내아들은 지난봄에 초등학교 1학년이 돼야 했을 나이다. 벌써 2년 전의 일이다. 그때 이 아이는 ´신장종양(腎臟腫瘍)´이라고 하는 매우 드문 아동병(兒童病)에 걸렸다. 그러나 곧 수술(手術)을 받고 지금까지 건강하게 자라왔다. 그런데 오늘, 그 병이 재발(再發)한 것을 비로소 알았고, 오늘의 의학으로는 치료의 방법이 없다는 참으로 무서운 선고(宣告)를 받은 것이다.
아이의 손목을 하나씩 잡고 병원 문을 나서는 우리 내외는, 천 근 쇳덩이가 가슴을 눌러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것은 시골서 보지 못한 높은 건물과 자동차의 홍수(洪水), 사람의 물결들이 신기(新奇)하고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그에게는 티끌만 한 근심도 없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했다. 자기의 마지막 날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사람을 맹목(盲目)으로 만들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또한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아빠, 구두.˝
그는 구두 가게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구두가 신고 싶었었나보다, 우리 내외는 그가 가리킨 가게로 들어가, 낡은 운동화를 벗기고 가죽신 한 켤레를 사서 신겼다. 어린것의 두 눈은 천하라도 얻은 듯한 기쁨으로 빛났다.
우리는 그의 기쁜 얼굴을 차마 슬픈 눈으로 볼 수가 없어서 마주 보고 웃어 주었다. 오늘이 그에게는 참으로 기쁜 날이요, 우리에게는 질식한 듯한 암담한 날임을 누가 알랴.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것을 ´천붕(天崩)´이라고 한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뜻이다. 나는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고서야 비로소 이 표현이 옳음을 알았다. 그러나 오늘, 의사(醫師)의 선고(宣告)를 듣고, 천 길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지는 슬픔을 주체할 수 없으니, 이는 천붕보다 더한 것이다. 6·25 때 두 아이를 잃은 일이 있다. 자식의 어버이 생각하는 마음이 어버이의 자식 생각하는 마음에 까마득히 못 미침을 이제 세 번째 체험한다.
2년 전 어느 날이었다. 수술 경과가 좋아서 아이가 밖으로 놀러 나갈 때, 나는 그의 손목을 쥐고,
˝넌 커서 의사가 되는 게 좋을 것 같다. 의사가 너의 병을 고쳐 준 것처럼, 너도 다른 사람의 나쁜 병을 고쳐 줄 수 있게 말이다.˝
하고 말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었고, 그 후부터는 누구에게든지 의사가 되겠다고 말해 왔었다.
이 밤을 나는 눈을 못 붙이고 죽음을 생각한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고귀한 것은 한결같이 슬픔 속에서 생산(生産)된다고 생각하면서, 더없이 총명(聰明)해 보이는 내 아들의 잠든 얼굴을 안타까이 바라보고 있다. 그러면서 인생은 기쁨만도 슬픔만도 아니라는, 그리고 슬픔은 인간이 영혼을 정화(淨化)시키고 훌륭한 가치를 창조한다는 나의 신념(信念)을 지그시 다지고 있다.
´신(神)이여, 거듭하는 슬픔으로 나를 태워 나의 영혼을 정화하소서.´/유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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