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엽에 이르는 나날은(즉 나의 10대의 끝에서 20대 초기에 걸친 시기가 되는 셈이지만), 우리에게 있어 이른바 `뱃멀미의 시대´였습니다.
그 시절엔 모든 주위의 사물이 흔들흔들 크게 요동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요동은 매우 오랫동안 강력하게 계속되어, 그것이 잠잠해진 뒤에도 우리에겐 아직도 지면이 줄곧 요동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 시대에는 모든 게 변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거기에선 당장이라도 무엇인가가 굳은 껍데기를 깨고, 지금 막 지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우리는 그 변동을 자기 손에 움켜잡을 수 있을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확연함 실감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거기엔 이상이란 것이 있었습니다. 또는 이상에 근접하거나 유사한 것이 있었습니다.
정치적인 투쟁이 있었고, 탄압이 있었고, 히피와 마리화나와 비스마르크와 반 전가가 있었습니다. 지미 헨드릭스와 짐 모리슨이 있었습니다. 재즈 음악다방에서는 프리 재즈가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치마가 점점 짧아지고 데모의 열풍에 휩싸였던 대학은 봉쇄된 채로 있었습니다.
악인이 있었고 선인이 있었습니다. 가치관은 반전되고 또 반전되었습니다. 진짜와 가짜가 똑같이 소리 높이 외치고 있었습니다. 진실의 언어가 있었고, 허위의 언어가 있었습니다. 깨끗함이 더러움이 되었고, 더러움이 깨끗함이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어언 20년이 지나 나는 마흔 살이 되었습니다. 내 나이 스무 살 무렵엔 잘 이해되지 않았던 일입니다. 20세의 청년이 20년이 지나면 40세가 된다는 것 말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서서 그 당시를 생각하면 나는 매우 이상한 기분에 잠기게 됩니다. 그 격렬한 시대를 탄생케 한 변동의 에너지는, 도대체 지금 이 시대에 무엇을 가져오게 한 것인가 하고, 그 당시에 매우 대단한 큰일로 생각했던 것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인가 하고, 이 소설을 쓰고 있는 동안에 그러한 생각은 줄곧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 소설은 정치적인 소설도 아니고 사회적인 문제를 다룬 소설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독자 여러분은 이 소설이 정치성이나 사회성에 등을 돌린 지극히 개인적인 종류의 소설이라고 느낄지도 모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진실입니다.
읽어 보면 알 수 있게 되겠지만, 내가 여기서 그려 내고 싶었던 것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이 소설의 간명한 주제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와 동시에 하나의 시대를 감싸고 있었던 공기라는 것을 그려 보고 싶었습니다. 사람을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은 자아의 무게에 맞서는 것인 동시에, 외적 사회의 무게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누구나가 그 싸움에서 살아 남게 되는 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긴 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시대>를 읽는 한국의 독자들에게
1989년 3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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