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적 귀결은 가당치 않아서, 그냥 조소의 화살을 방패 없이 흠뻑 마음으로 맞아 제치기로 한다.
마냥 떠오르는 생각을 묻어 버릴 수 없어서 이렇게 늘어놓는다. 단순 간결을 핑계로, 비웃음을 벗어나지 못함을 스스로 알면서, 내 푸념 섞인 헛소릴 한껏 풀어 놓는다. 딴에는 내 속을 후련히 다 털어놓으려 애쓰지만, 그래도 그만 마음뿐이다. 마냥 병석에 갇혀있는 심사다.
‘없다’라는 말은 ‘있다’를 숨기고 ‘있는’ 것을 전제로 비롯된 말이다. ‘없음’은 내 오감에 닿아 표현되는 울에 가두고 드러내는 표현이라 여겨서 생각해 본다.
내 눈에 보이는 것, 만져지는 것들은 그것이 보이지 않거나 만질 수 없을 때 ‘없다.’라고 할 것인데, 그것은 멀리(시 공적 제약) 떨어져 있거나 가까이 있어도 볼 수 없을 때(인간 한계) ‘없다’라고 할 테지만 그 실(實)은 ‘있는’ 것이다. 또 냄새를 맡아서 사물의 존재를 알게 될 수도 있다. 그 냄새가 없을 때 없어진 것은 아니다. 멀리 사라졌거나 다른 물질로 변한 것이리라. 역시 ‘있는’ 것이다.
달리, 한때(時刻) 말하지 않은 것을 말한 적 ‘없다’라고 할 때 그 ‘없다’라는 것은 그 행위를 부정하는 것이니 행위의 가능성인 있음을 전제한 말이다. 역시 그 말을 내뱉지는 않았지만, 속엔‘있는’ 것이다.
‘없다(부정)’라는 말은 긍정(肯定)의 짝이라고 보아 그 짝, 긍정이 없으면 부정도 없을 것이다.
모양(형용)이 어떻고 느낌이 어떻고 하는 말도 그 말뜻의 원의(願意)를 제쳐놓고서는 이 말들은 생겨날 수가 없으니, 처음부터 있는 것을 찾아내지 못해서 없는 것처럼 된 것이다.
살피면, ‘흰 모자가 어울리더라.’라고 할 때 ‘흰’ 은 ‘검’은 것이 감추어진 짝의 표현이고 ‘모자’는 민(모자를 안 쓴)머리를 감춘(생각) 상태와 짝이 된 표현의 말이 되었다. ‘어울린다.’라는 말은 ‘그렇지 않다(안 어울린다).’라는 말의 반대 표현이다. 또 있다. 이즈음 IT(정보통신) 시대에 파생되는 말마디도 또한 짝(이거나 어원:語原)은 있게 마련이다. 다 모아서 추려보면 ‘있는’ 것은 ‘없는’ (드러나지 않은) 것의 짝 말이다.
세상은 있는 것,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생각으로만 있는 것, 모두가 그 원천은 단 하나 ‘있다’라는 그것의 파생(물질, 비물질, 심령, 등등)물이다. 그래서 모두는 하나이고 그 하나는 '있는' 그것이다. 그 밖의 모든 표현은 원초적으로 없는 것이다. 즉 모든 사유(思惟)가 바로 세속적 산물이다. ‘인간인 내’가 없으면 세상도 우주 만물도 없는 것인가? 아니다.
본질은 하나, 곧 표현 불가능하고 우리가 모르는 하나일 수밖에 없는, 곧 진리의 한 점만이 있을 뿐이다.
이 점을 나는 ‘신(神)’이라고 할 것이다. 우주도 한 점이 시원(始原)이고 그에 속한 모든 게 하나이고 가늠할 수 없는 크기다. 아니 우리로서는 가늠할 수 없는 작은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하나’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이 하나를 신(神)격화한다. 그리고 믿고, 맡긴다.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