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버린 일과 앞으로 닥칠 일을 함께 꿰뚫어 알고 산다면 이토록 사회가 혼란스럽고 곳곳이 피로 얼룩지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 끝과 시작이 한 줄로 꿴 프로그램처럼 엮어질 테니까 사람은 자기 자리를 미리 알아차리고 그 자리 밖으로는 벗어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고뇌와 형벌과 죽음이 함께 시차별로 보이고, 웃음이 넘치는 즐거움이 상응하게 자기 앞에 기다리고 있으니 먼저 쟁취하려 해도 부질없음을 내다보게 되어 무모한 소모전을 할 까닭이 없어지기 때문이리라.
이런 갖가지 일어날 일들을 내다보면서 왜 어리석은 짓을 하겠는가. 생각해 보면 불확실한 미래를 내 힘으로 헤쳐 나가면서 남을 밀쳐서 떨어뜨리고서야 가능한 일을, 그것도 반대로 자기가 밀려 떨어질지도 모르면서 도전하는 것이니 앞날을 알고 과거를 안다는 것은 그야말로 인류가 해결해야 할 가장 큰 과제일 것 같다.
한데 미래의 이것을 풀 수는 없다고 치고, 지나간 것은 우리의 앞날을 점치게 하는 시금석 역할도 될 것인즉 우리가 우리 안에 가진 것을 통틀어서, 지금까지의 기억을 좀 더 정확히 길게, 육신으로만 이어갈 것이 아니라 같은 맥락으로 정신도 함께 이어서 후손에게 내려준다면 앞날의 짐작도 가능하고 또 삐뚤어짐 없이 고르게 펴서 생활할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이는 생물학적으로, 과거의 모든 행적이 우리의 육체 안에 담겨서 대를 잇듯이 정신도 대를 이어서 물린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바르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것은 과거가 교훈으로 받아들여져서 앞을 가늠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부분은 세대를 겹쳐서 사는 구시대에는 그런대로 글로, 말로, 행동으로, 남의 거증(擧證)으로 알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지금처럼 핵가족화한 시대라든가, 어떤 연유로 해서 알 수 없는 경우에는 그들의 능력으로는 자기를, 자기를 있게 한 계보의 하나하나를 알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점은 인간의 본성인 듯, 먼 나라에 입양된 고아들이 저주스러운 자기의 부모를 찾아 헤매는 데서 더욱 절실해지고,
절박한 현실인데도 별다른 방도가 없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근본적 문제를 제시한다. 육신은 물려주어도 영혼 즉 얼은 육신과 별개로써 다른 영역에 속하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만약 육신을 물려주듯이 정신도 물려준다면 개체로서의 인간은 이미 말살된 것이니 이는 창조의 본질을 모독하는, 가설일지라도 입에 담을 수 없는, 중대한 범죄적인 발상이다. 다만 사람은 지나간 것과 앞일을 영감으로만 알 수 있으니 이 영감이 각기 부여받은 능력에 따라 조금씩 다르고 자유로워서 인간으로서의 가능성을 조금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뵈었는지 뵙지 못해서 기억에 없는 것인지, 할머니의 여형제 한 분이 ‘창도’에 살고 계신다는 얘기를 어릴 때 들은 적이 있는데, 이모할머니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이런 괴상한 생각을 해보았다.
자기가 한평생 겪고 생각했던 것은 모조리 손톱만 한 주머니에 담아서 귀 볼 같은 안전한 곳에 저장했다가 이것을 후손에게 물려주고 차세대는 여기에 자기의 한평생을 덧붙여서 차세대에 물려준다면, 이런 때 창도 이모할머니를 눈감고 끄집어내어서 훑어 뵙고, 다시 닫아놓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다.
생각만으로도 죄를 지었다.
내 기억의 한계를 야속하게 여기면서, 차라리 ‘창도 할머니’의 존재 여부 기억조차도 없었더라면.
그 기억인들 왜 남아서 나를 애달프게 하는지 모르겠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