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리쌀

외통궤적 2008. 4. 5.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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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8.000903 장리쌀과 논

눈 녹은 물이 발자국에 고여 살얼음이 질 때쯤, 돼지의 밥통 긁는 소리가 싸리 울타리 넘어 들려오는 때쯤, 나는 책보다리를 싸들고 동무네 집을 나선다. 살얼음을 피하려고 고개는 아래로 숙이고, 발은 제 걸음을 찾지 못하고 허둥거린다. 부서지는 살얼음 소리가 밥 강정을 깨물 때 나는 소리와 같다. 이 소리가 내 어금니를 즐겁게 한다. 그러니 가랑이가 찢어지도록 벌려서 하얀 발자국 얼음을 딛고 빠지면서라도 빨리 가야한다. 어금니는 악다물어 뿌드득 갈리고 입가는 귀밑을 향하여 올라간다. 오늘만은 아니면 좋겠는데, 문을 열고 먼 발치에서 보아하니 단촐한 밥상을 앞에 두고 나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이가 유난하게 희다. 흰 죽 사발만이 가지런하고 간장종지가 하나있을 뿐이다. 모든 것이 희다. 사발도 희고 죽도 희고 이도 희고 할머니의 머리조차 희다.

 

 

흰 죽. 죽기 보다 더 실은 음식이다. 차라리 돌을 씹는 것이 낳을 것 같다. 아침밥 때마다 뭉쳐 주는 밥 강정과는 너무나 다른 입안에서의 느낌이다. 물은 물이라서 그냥 삼키면 되지만, 죽은 그냥 삼킬 수 도 없고, 그렇다고 깨물자니 깨물리지도 않고 진저리 처진다. 웬만한 구리철사 줄도 끊어내는 이빨이 그냥 하릴없이 제 영역을 스치는 물체엔 짜증스러웠을 것이고, 볼은 볼대로 힘을 쓸 겨를도 없이 지나치는 물체가 야속했을 것이고, 잇몸은 잇몸대로 아무 자극도 없으니 심심했고, 턱 아귀는 아귀대로 저항을 이기는 뻐근한 쾌감을 잃었으니 모두가 허무인 것이다.

 

 

아무 말 없이 연신 퍼 넣기만 한다. 먹는 것이 아니라 흘려 내려가는 것이다. 다만 두 눈썹 사이는 코 뿔을 향하여 계속 조금씩 좁혀져서 맞붙을 것 같았다.

 

늘 들은 할머니의 말씀, 저녁 죽 삼 년이면 논 서 마지기가 된다!

 

거역 할 수 없는 집안의 연중행사인 것을 어떻게 하랴. 아무도 예외 일 수는 없다. 어렴풋이나마 느끼지만, 한 때는 장리(長利)쌀도 얻어서 살림을 꾸려나온 듯하다. 장리 쌀. 무서운 장리쌀이란 무슨 뜻이지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흰죽을 그저 먹어 주는 것만이 대수다.

 

내 키가 훌쩍 자란 뒤에야 알았지만 장리쌀은 일 년에 오 할 이자 턱이 되는 나락이나 쌀을 현물로 빌린 대로 갚아야 하는 무서운 양식이다. 그래서 죽을 먹었다. 내가 자랑 할 수 있는 것, 식구들의 집안 일으키기 실화다. 그래서 우리들 졸개가 다 장성할 무렵에 우리 집은 부를 축척하진 못했어도 삼십 마지기의 논이나마 마련 할 수 있었다. 남이 부러워하는 동네의 모범사례 집안이 되었다.

 

이름 하여 ‘괸 돌집.’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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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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