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향전

외통프리즘 2008. 6. 19.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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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전

1594.010127 춘향전

창고의 양곡糧穀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게 다 떨어 먹고 쥐조차 떠나버릴 처지가 되었는지 쥐새끼 한 마리 없다.


양철지붕 껍데기만 덩그렇게 남아있는 이곳에는 얼마 전까지 곡식이 가득히 차있었다. 그  양곡은 어디로 갔는지 알아볼 사람도 없고 신경 쓰는 이도 없다.

 

창고의 곡식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우리 동네, 우리고장의 청장년들은 누군가에 의해서 이 창고의 곡식을 퍼냈듯이, 제각기 억눌렸던 속마음을 털어 퍼내려 몸부림쳤다.

 

하늘에 닿을 해방의 감동이다.

 

무엇이든지 저지르고 싶은 충동을 받는 청장년들이 자기들 마음을 털어서 곡식대신에 창고를 채우기로 했나보다.

 

기차정거장 가는 한길목의 넓은 공터를 끼고 깊숙이 집어넣어 넓게 자리 잡은 집, 은색 양철을 씌워서 만든 이 창고는 겉으로 봐서는 그럴듯한 집이지만 이름 그대로 창고이니 이 안에 들어가 보면 하늘이 보이고 바람이 살 같이 지나 맞은편 구멍을 뚫는다. 그래도 이곳이 우리고장의 제일 큰집이니 이곳을 기틀로 하여 무언가를 꾸미려는 모양이다.

 

있는 것이라고는 죄다 동원되는 마을의 큰 잔치다. 소문은 보름을 넘게 나있고 동네 어머니 누나들은 이미 설레기 시작했다. 입장료는 없다. 하기야 돈 받으면 '신파'인지 춘향전인지 누가 처다 보기나 하겠나? 공짜라도 많이만 와 주었으면 대수일 텐데 뭐.

 

극단을 꾸미는 주최 측은 공짜라도 구경 오길 노심초사할밖에 없다. 갖춘 것이라곤 하나같이 부족하고 미흡한 것뿐이다.

 

 

소나무 원목으로 칸을 지르고, 무대를 만들어서 전기 가설을 하고, 다락을 매어서 이층 관람석도 만들고, 거적을 깔아서 앉을 자리를 만들고, 양철 쪼가리를 오려서 조명기구를 만들고, 아무튼 흉내는 내야 야밤에 사람얼굴이라도 뵐 것이 아닌가. 그렇게 해서 그런 대로 문은 열었다.

 

다른 것은 다 엉성한 가짜라도 막을 울리는 징 소리만은 정말로 진짜다. 으레 그렇듯이 몽땅 싸안아서 쓸어낼 듯, 곧 벼락이라도 칠듯하다가 점점 작아져서 사람의 가슴을 후벼내듯이 자지러지길 몇 번이나 하여 긴장 속으로 끌어간 다음 올라가는 막은 흰 광목을 이어댄 포장이다.

 

아직 대사를 외우지 못한 배역들을 위한 대본 읽기가 관중석 한가운데까지 들려도 그들의 의지를 가상(嘉尙)하여 아직은 아무도 험하지 않는다.

 

얼마가 지났다.

 

육성이 들려도 그만 안 들려도 그만인 춘향전의 무대는 갖가지 조명으로 휘황하지만 춘향이나 향단이나 춘향모 월매나 하나같이 남자목소리이니 객지에서 돌아온 온갖 잡것들이 그냥 있을 리 없다.

 

한마디씩 거들고 야유가 무대를 압도한다. 용기 있는 주최 측의 누군가가 슬그머니 그들에게 접근하여 제지하는 것이다.

 

대충 끝낸 춘향전 뒤풀이는 야유하던 패들의 무대로 바뀌고 말았다. 노래자랑과 판소리와 육자배기와 서도민요의 장기자랑이 됐다.

 

통금도 없고 임검(臨檢)원도 없는 한판 굿이 벌어졌다. 갈 사람은 가고 있을 사람은 있으라는 식이다. 내일이 없는 놀이판이 됐다. 시골은 시골이다. 그래도 볼 사람은 끝을 마무리하고 일어선다.

 

나는 기지개를 겼다.

 

양철지붕 귀퉁이의 이음새 구멍에 초승달이 반쯤, 별이 두 개 내려 보다가 막 얼굴을 감추려든다.

 

밤하늘의 별들이 쏟아져 내려서 창고를 뒤덮고 우리를 덮는다. 만고에 남아, 후회 없는 춘향전이다. /외통-

오늘 가장 좋게 웃는 자는 역시 최후에도 웃을 것이다.(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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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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