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당번

외통인생 2008. 6. 29.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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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당번

1653.001229 소 당번

학교가 생활의 전부이고 보니 학교의 지시는 거역할 수 없었다. 적어도 소학교 시절에는 그랬다.

 

어린이들이 돌보기엔 너무나 큰 암소를 끌어다 놓고 우리로 하여금 기르도록 했다. 지금 같으면 온 나라가 들썩거리며 기절초풍할 터인데도 그 무렵에는 아무도 토를 다는 이는 없었다. 아마도 소는 집집이 있는 것이고 학교도 지붕을 인 집이니까 마땅히 있어야 하는 것쯤으로 여겼는지도 모를 일이다. 널찍한 빈터에 소나 끌어다 매었으면 속 시원할, 앞날이 꽉 막힌 때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옆에 다가가 봐도 우리 소 같지 않고 멀리 떨어져서 보아도 어디서 훔쳐다놓은 소 같다. 아주 저 멀리 운동장 끝에 나가 보아도, 간이 외양간에 매인 소는 전혀 학교하고는 어울리지 않았다. 억지로라도 하나 어울리는 것이 있다면 학교도 골탈 칠을 한 송판으로 지었으니 검고, 지붕도 검은 색의 양철 지붕이니 검고, 소는 칡 소이니 검어서 어두운 점이 억지로 어울리고 닮았다고나할까.

 

소를 맡았으니 하루의 소먹이 걱정이 계속된다. 오늘은 이 일이 나와 뚱보 친구에게 지워졌고 이로써 서로를 알게 하는 작은 씨앗이 뿌려졌다. 만나야 할 장소를 정하며 가지고 나올 연장을 분담하고 꼴을 베러 갈 곳을 정하는 등 나름의 기획이 짜여졌다.

 

감당할 수 없던 큰 소를 이렇게 걱정을 나눔으로서 어깨가 조금은 가벼워졌다. 소를 굶기지는 않았지만 소도 조무래기들이 뜯어다 주는 풀 맛이 있을 턱이 없었을 것이다. 소화는커녕 내내 트림만 하며 발굽질만 하고 있었다. 이렇게 당번이 한 차례가 돌아오기 전에 소는 벌써 앙상하게 뼈만 남게 됐고, 드디어 어느 날 외양간이 비고 말았다.

 

그동안 운 나쁜 그 칡소는 감옥에서 산 꼴이 됐고 우리는 겨우 간수노릇이나 한 꼴이 됐다. 그 소가 왜 감옥생활을 하게 됐는지, 자유의 몸으로 출소해서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아는 아이가 없었다.

 

옳게 받아 생각해서, 그 소의 생김이 칡 소라서 우리의 전통 정서를 이을 양, 한 꾀를 내어 멀리 팔려나가지 않도록 했다고 생각 할 수 있다. 혹 나쁘게 얽어 생각해서는 누군가 소를 키울 형편이 어려워지자 임시로 사육토록 위탁했을 것이다.

 

이 당번의 기회가 우리생의 긴 여정에서 지난 것을 얘기하는 또렷한 징표가 됐고 만날 때마다 이 이야기부터 시작하여서 세월과 곳을 넘나들며 세로로 가로로 끝없이 얘기꼬리를 엮어가는 실마리 구실을 한 것이다.

 

이 일 또한 이변이라서 나를 인생의 한 마디, 그루터기를 지게 했으니 고맙다. 이나마도 이변이 없이 그 날이 그 날 같은, 채 바퀴 생활이었다면 나의 삶은 그만큼 짧아졌거나 끊어졌을 것이다.

 

이변이 없으면 시간은 정지된 것이나 마찬가지로 되는 것은 시간은 영원하고 닳지 않고 정지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리라. 변하지 않는 것이 시간에 구애될 수 없고 변하지 않는 것에 시간의 의미는 없기 때문이다. 작은 이변이 나를 되돌아 생각하게 하고, 그래서 곱씹을 거리를 만드니 고맙기만 하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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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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