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

외통인생 2008. 6. 2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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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수

1705.010203 재수

낙제생이 거치는 과정을 재수라고 생각한 나는 앞집 내 친구 ‘덕재’의 재수, 아니 유급을 용납할 수 없었다. 졸업하면 당연히 상급학교에 진학하든지 아니면 가사를 돕든지 해야 할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뛰기는커녕 거꾸로 주저앉는 모양이 마음에 안 들었다.

 

혼란기의 진학이란 학교가 있는 연고지에선 그리 어려운 것만은 아니었던 때였다. 외지에서의 유학비용이 마련되지 못했던 나는 진로를 결정하지 못하고 한 해 동안이라도 가사를 돕기로 했다.

 

그러니 ‘덕재’ 어머니는 우리 어머니를 찾아와서 ‘해방을 맞은 지 일 년밖에 되지 않으니 배움도 일 학년생 정도밖에 못 배웠을 것이고 그러니 더 배워야 할 것이 아니냐.’는 뜻을 비치고 앞뒷집에서 동무삼아 같이 한해 더 보내자고 했고 어머니는 나와 의논해 보겠다고 하셨던 가보다.

 

나는 자존심을 앞세워 어머니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진학을 해도 시원치 않은데 낙제생 같은 유급 생활을 하다니, 단호히 부당함을 주장하고 한 해를 쉬고 진학하겠다고 분명히 밝혔다.

 

부모님의 난감한 입장을 역력히 읽을 수 있었다. 즉 책보를 옆에 끼고 배움의 집으로 나가는 ‘덕재’의 뒷모습과 지게를 지고 산으로 가는 내 뒷모습이 함께 눈에 선히 보였을 것이기에 부모님은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아들로부터 무언의 저항을 받는 느낌과 탓할 수 없는 주장에 부모님 또한 답답하여 묵묵히 지내셨다.

 

손재간이 남달랐던 그가 일 년간 얼마나 더 배웠는지는 몰라도 빤한 과정을 다시 일 년 허송하느니 차라리 새로운 경험과 체험을 통한 인생공부도 됐다는, 지금의 내 생각이고 바른 판단이었다고 여겨진다. 나는 동생들과 함께 배우는, 자존심 상하는 짓(?)을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다.

 

기억하느니, 당시의 일 년은 내게 있어서 우리나라의 역사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잃었던 것은 아쉬운 점이였으나 그 부분은 뒷날 책을 읽음으로 얼마든지 보충되었다. 결국 명분을 잃지 않은 나의 행동은 계속되어서 신설되는 중학교에 오히려 ‘덕재’보다 한 학년을 건너 뛰어 이 학년에 시험 봤고 그는 순서를 밟아서 또 중학교 일 학년에 밟아 올라오니 이번에는 거꾸로 그보다 한해를 앞선 꼴이 됐다.

 

나의 옆 돌아보지 않는 버릇은 이미 이때부터 싹이 자랐나보다. 나의 이 못된 성정은 지금도 살아서 사람을 사귀는데 다른 이들보다 오랜 시간과 여러생각을 더하는 헛된 짓(?)을 하곤 한다. 내가 먼저 내 약점을 보여야 남도 그의 약점을 들어내는 것이거늘 티끌만 한 배움으로 태산 같은 지식을 쌓아 묵직이 거동하는 모든 이와 접촉한다는 것은 내게 있어서는 전쟁터에서 적의 동태를 살피는 척후병의 구실로밖엔 세상에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은 신중함이 필요했다.

 

이것이 지금도 내 행동의 근저(根底)를 지긋이 짓누르고 있다. 앞뒤가 있을 수 없는 배움에도 이토록 주위를 의식했든 나였기에 일찌감치 그 대열에서 이탈하여 아무도 대 볼 수 없는, 나만의 생을 살고 있다.

 

지금이야 유급이 아닌 재수가 된들, 삼 사수가 된들 손가락질 할 사람이 없겠지만 당시의 시골에선 그렇질 못했다. 겨우 이 백여 호 되는 마을에서 그것도 삼성(三姓)바지가 못자리해 놓은 듯이 살고 있는 동네에서의 내 형편은, 마음은 추진체에 연료가 빠진 로켓같이 움치고 뛸 엄두를 정말로 낼 수 없던 때였다. 그러나 연료는 스스로 마련됐다. 그것이 용기였다. 우선은 발사대를 높이고 여기서 연료를 태울 것을 모색했으나 전쟁으로 또 중도 불시착으로 이번에는 연료의 탱크조차 파열되고 말았다.

 

이후 영영 추진 체는 복원되질 못했다. 제도적 단계의 교육이 필요하나 반드시 반복 훈련식 교육을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기에 후회는 없지만, 누가 인생을 한 번 더 유급(?)하라고 하면 기꺼이 할 것 같다. 그래서 실컷 배우고 낭만적인 삶을 살아 보고 싶다. 이것은 내 본심이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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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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