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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통인생 2008. 7. 1.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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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7.010108 주문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한 나날이 계속되는 신나는 세상이다.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 그것조차도 알 수 없다. 흥이 넘치는 하루하루가 살맛이 나는 때였다.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며 한껏 기지개를 켰다.

 

해는 하루 종일 아침 해처럼 찬란했다. 오늘도 우체국 문으로 서슴없이 들어가는 익숙한 걸음걸이였지만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낯설었다. 몸을 주리 틀고 눈을 있는 대로 키워서 두리번거리고, 발을 돋우고 창구 너머의 이상한 것들을 눈에 익히느라 넋을 잃고 있었다.

 

전번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본 것이다. 요새 들으면 아득한 옛날의 이야기 같지만 한 시대를 사는 사람이 경험하는 꼬리와 머리의 차이를 한 몸으로 느껴야하는 우리는 그나마 그때는 머리를 싸매고 헤집는 앞걸음이었으니 지금은 쑥스럽고 허탈함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 때는 최첨단을 맛보는 여린 혀가 이제 그 초라한 모습, 모스(morse) 부호를 두들기는 신(?) 통신기를 늘어놓아 얘기해야 하는 극단의 한 매듭을 양손에 쥐고 무어라 놀릴 것인지 굳은 혀가 민망하다.

 

콧구멍이 말라 딱지가 보이고 귀밑의 때가 귀 그늘처럼 어울리는, 그런 얼굴의 나를 상상해 보리라. 모름지기 그 때는 그러했으리라. 나는 모르는 일이다. 발을 빼고 싶지만 아마도 그때의 내 얼굴은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옷은 삼베 중이에 반바지, 까만 고무신을 신고 검은 책보따리를 허리에 둘러 묶고서 빨간 우체통이 손짓하는 집으로 발길이 옮아가는 것을 스스로도 모른다. 그저 그곳에 가면 무언가 수가 날 것 같은 막연한 느낌이 들뿐이다.

 

일단 방안의 분위기를 살피고 조심스럽게 창구로 다가서서 종이쪽을 내 밀면서 이 책을 주문하려는데 어떻게 하는지를 가르쳐 달라고 조른다. 내 민 종이쪽지는 신문의 광고 쪼가리다.

 

턱이 높은 창구는 이런 때에 아주 불편하련만 의외의 꼬마손님을 위해서 별도의 창구를 만드는 아량은 아직 없었다.

 

진체(후리까에:振替)용지를 주면서 쓰라는데 얼떨결에 받기는 받았지만 난감하다. 더듬더듬 한참을 애써서 쓰기는 했는데 이번에는 돈이 없다. 집으로 달려갔지만 아무도 없는 집에서 돈을 어떻게 구한단 말인가. 하는 수없이 그 날은 체념하고 다음날로 미루었다. 헌데 그날 밤이 그렇게 길수가 없었다.

 

재미있는 얘기책이란 어떤 것인지도 궁금하고 여러 가지 책 중에서 주문한 책이 마음에 들는지, 과연 여기서 일본 동경까지 돈이 가는 건지 오는 기간은 정말로 지켜지는 것인지 모조리 백지이니 뜬눈으로 지새우는 수밖에 없었다. 학교 수업도 될 리가 없다. 빨간 우체통이 놓인 새 기와집, 우체국이 머리에 꽉 차있을 뿐이다.

 

 

영수증을 받아 들고 돌아서는 내 마음은 흥분과 기대로 뜬구름을 타고 둥둥 떠다녔다. 지루한 나날의 보름이 지났다. 소포라는 우편물이 우리 집에 도착했을 때 내 기쁜 마음을 표현하기에는 내재주, 표현방법이 너무나 무디다.

 

이날까지 소포라는 것을 받아본 일이 없던 우리 집도 집이지만. 무슨 경사라도 난 것처럼 온통 난리가 난 것이다.

 

우리식구 누구도 내가 이런 일을 하리라고는,  엉뚱한 일을 저질르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학교에서도 오직 나만이 이 재미있는 얘기보따리 책을 갖고 있으니 모두들 신기하게 생각한다.

 

내 의기는 올랐다. 모두에게 자랑이 된 이 책은 동화의 줄거리를 따서 각색한 일본식 어린이 얘기책이다. 아쉬운 것은 이 책의 내용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사실 앞에 무력감을 느낀다. 이토록 철저히 망각될 수도 있는 것이냐를, 어떤 경위를 통해서도 내가 알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든다. 우체국, 지금은 뒷방 늙은이들이나 추억 속에 더듬을 한 때의 양양했던 발자취다. 특히 어린이에 있어서 이 우체국은 세상을 알고 세상을 더듬어보는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구실을 집안의 컴퓨터가 대신하니 구시대의 퇴물인 우체국이 발끝에서 곧 살아질 듯 간질거리고 머리 위에서 컴퓨터의 E메일, 통신판매, 홈뱅킹, 인터넷 등 눈부신 변모를 내 한 몸인 머리와 손끝으로 묵직하게, 함께 느껴야하는 격동의 세도막 난 시대를 이어온 내가 감당해야 한다. 눈부신 산업정보화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형국이 됐으니 지난 모든 것이 이제는 꿈속의 과거로만 아름다울 뿐이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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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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