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에 언덕이나 산이 병풍처럼 둘러서고 앞은 넓지만 트이지 않은 곳이 우리의 정서에 들어맞는 집터지만 , 이런 집터는 우리네 농촌의 전형일 뿐이지 거의 평지에 짓거나 뒤에 작은 가림 구실을 하는 언덕이 있거나 대밭이 있으면 그런 대로 좋다고 해야 할 것이다 .
우리 동네는 평지라서 어디에도 언덕이라고는 없다 . 허나 편리하게도 집집이 반듯한 평지로 트인 넓은 마당과 길을 끼고 있어서 사통팔달 , 어느 집이든지 우마차나 다른 운송수단이 들어갈 수 있어서 오히려 편리한 점이 좋다 .
이런 동네에도 뒤늦게 집터를 잡은 집들은 한쪽으로 밀려서 비교적 못한 집터를 마련할 수밖에 없다 .
우리 동네에서는 집터로써 그중 못한 곳이 제방 밑이고 강변인데 , 여기도 집들이 차례로 들어서다 보니 둑에서 멀리 있는 집일수록 좀 낳은 집이 될 수 밖에 없다고 하겠다 .
우리 반 친구의 집이 이곳에 있어서 이따금씩 가보게 되어 그쪽 형편을 조금 알고 있다 .
이런 곳의 집들은 한결같이 작고 부속건물이나 텃밭이 없다 . 방만 두어 개 달랑 지어진 집이 대부분인데 들고나는 이삿짐이 잦은 곳이 이곳이다 .
이곳에는 같은 성을 갖고 있는 집이 없다 . 각 성이 못자리 한 곳이다 . 이곳에선 언제든지 개울가로 나갈 수 있고 또 큰 다리를 건너서 들로도 나갈 수 있다 .
나가면 길목이고 다리목이지만 여기서 학교까지가 아주 가깝기 때문에 친구는 학교가 그의 집이나 다름없다 . 잠자고 밥 먹는 시간을 빼고는 학교마당이 놀이터요 집 , 앞마당처럼 홀로 남아서 벽보고 공차기를 할망정 집에 들어가질 않는다 .
한길건너에 아름드리 소나무 밭이 있고 사시사철 물소리를 들으며 하늘을 가리는 버드나무와 ‘ 프라더나스 ’ 나무가 진을 친 면소와 주재소와 학교가 있는 곳이기도 한 , 이곳은 한길에서 푹 꺼진 곳이고 조금 답답하리만큼 집들이 배게 들어차 있다 .
친구의 성이 소나무와 냇가를 어울리게 하여 지은 개명한 ' 창씨 ' 인지는 몰라도 그 가족이 자리한 집터와 아주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 ' 소나무와 내 ', 송천 ( 松川 : 마쓰가와 ) 이 특별해서 생각나고 행동이 유별하여 잊지 못하나보다 . 그는 늘 같은 옷을 입었으며 그러고도 운동장을 종횡으로 누비는 , 운동을 좋아하는 친구였다 .
그보다 두 살 위인 그의 형은 우리 친구들이 흉내를 낼 정도로 놀이에 열중하고 신명이 많은 형이었지만 통하는 것이 없으니 그냥 바라다 볼 뿐인 친구의 형이었다 . 그 친구의 밝은 생활에 비추어 집안 사정은 아직 어려운 편이여서 점심을 때우는지 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
학교 앞이니 집에 가서 먹을 터이지만 , 그 시간은 짧았고 점심시간의 텅 빈 운동장엔 언제나 그 친구 혼자 공차기를 하고 있었다 .
해방을 맞고 경황없이 지내며 각자의 길을 가고 있는 사이 이 형제의 소식도 없어졌다 . 자고 나면 뉘 집은 ' 이남 ' 으로 갔고 뉘 집은 어디로 갔다는 소리가 들렸던 그들 거의가 월남했던 것을 내가 이쪽에 와서야 알게 됐다 .
그 때는 그 집도 그렇게 떠나간 것으로 알았지만 그것은 아니었다 . 고향에서 해방을 맞고서 채 이태가 되지 않은 때의 어느 날이다 . 학교 운동장 한복판에 이상한 복장을 한 사람이 운동장이 비좁다는 듯이 홀로 서서 , 그것도 오랫동안 버티고 서서 교사를 응시하고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 조금조금 오른쪽으로 돌면서 뒷산과 마을과 사택을 번갈아 가며 자세히 살핀다 .
내가 머물 이유가 없어서 지나쳤으나 그가 어디에서 온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운동장에 서있었는지를 모른 채 지나갔다 . 훗날 들었는데 그는 친구의 형으로 일찍이 군에 들어가서 장교가 되어 고향에 왔다는 것이다 .
그러면 그의 동생 내 친구도 그쪽으로 발을 들였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지금은 지나간 활동사진의 흐트러지고 끈긴 필름의 한 가닥을 쥐고 들여다보며 이 앞은 , 이 뒤는 , 만져보고 들여다봐도 신통치 않은 , 그런 안타까움뿐이다 .
그들이 먹고살기 위해서건 출세를 위해서건 이제 그런 것을 따져서 무엇 하겠는가 . 다만 , 운동장 한 복판에 버티고 섰던 그가 그때에 무엇을 생각했는지 궁금할 다름이다 .
나는 언제 그 운동장에 무슨 옷을 입고 어떤 자세로 서게 될지 아득하기만 하다 . 꿈을 깨야 하나보다 . / 외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