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물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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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물 곳 5484.021028 머물 곳 울 안팎을 노랗게 물들인 개나리꽃 사이사이에 섞인 진달래가 개나리꽃에 질세라 연분홍 빛을 흩뿌려서 경계(境界)목 울타리의 상록수와 한껏 어울리고, 그 양지쪽에는 물기 먹은 풀잎의 녹색융단이 깔린다. 훈훈한 바람이 감겼던 내 눈을 띄웠고, 길게 울리는 열차의 고동이 내 마음을 흥분시키며 설레게 한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토요일 오후의 회사 정문을 나와 동서남북을 차례로 향해 서서 그 쪽 먼 하늘을 바라보며 망설인다. 아래를 내려 보면 파란 풀, 눈을 깔아 비껴 옆을 보아도 하늘거리는 봄꽃, 약동하는 생명체는 그대로 봄을 만끽하고 있건만 고동치는 가슴은 여기에 영합하지 못하고 애써 멀리 하려고만 한다. 벌써 서울로 가기로 정해 놓았던 그 주말이 다가왔다. 가야지 하면서도 마음을 다잡아 발을 옮길 수가 없어서, 누군가가 이끌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엉거주춤한다. 짐짓, 아닌 체 하지만 내 행동은 이렇게 되고 말았다. 전국이 내 집이다. 마음 달리는 허황함도 잠시, 갈 곳 모두가 함께 내 마음을 지그시 눌러 내리면서 어떤 저울에 달아도, 어떻게 저울질한다 해도, 다른 추를 올려놓게 되어 무게는 매양 그게 그거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천애(天涯)의 고아는 아니다. 나는 단지 가로막은 휴전선으로 인해서 고아가 된 고아이다. 가지 못해 몸부림치다가 이제는 기억조차 아물거리는 고향이 되어버렸지만 이런 때는 사무치게 그립기도 하려니와 혈육에 의지하고 싶은 마음도 또한 절실하다. 지금의 내 어려운 상황은 덮어두고, 마땅한 의탁처가 없기 때문에 맡긴 부산의 아들을 보러가야 옳은가? 대문을 잠그고 나선지 어느 새 한 달이 되어버린 비워 둔 내 집, 먼지가 치로 앉았을 것이며 우편물은 신문과 함께 어지럽게 집 주위에 흩어있을 내 집, 보아주는 이 없이 버려진 화초들은 소리 없는 절규로 시들어지며 주인을 원망할 그 집, 욕심껏 담아놓고 돌보지 않는 된장 간장은 무심한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며 부글부글 괴어만 넘치는 장독대가 있는 내 집, 눈독 드리던 밤손님이 온 방안을 휘저어 난장판이 되었을 것 같은 대구의 빈집을 둘러보러 가야 옳은 것인가? 아픈 사람은 아파서 들락거리고, 멀쩡한 사람은 남이 알지 못하는 나름의 사연을 안고서 들락거리고, 자기 순화(純化)를 위해 꼭 찾아야 할 사람이기에 찾아 오가는, 그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삶의 확인과정을 그 큰 눈을 굴리면서 지켜보다가 못내 고개 돌리며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들은 대체 어떤 존재인가를 곱씹고 있을, 서울의 ㅇㅇ병원에 입원해 있는 아내에게 내 못한 죄 값을 무겁게 안고 다가서야 옳은가? 마음이 요동친다. 비중은 그만그만하다. 어딜 생각해보아도 반드시 그곳에 가 있어야 할 내 몸인 것을 어쩌면 좋으랴! 싶어서 먼 곳 하늘을 당겨보고 그 하늘 아래를 기웃거린다. 아들은 우리의 희망이고 미래인 것이기에 착실히 보살펴야 하는 무게의 추(錐), 앞으로 이사 갈 집일망정 당장(當場)은 보금자리인 것이기에 먹고 자고 아우를 집인 것을 흉흉한 폐가로 만들 수 없기에 한번쯤 둘러보아야 하는 무게의 또 다른 추, 가정의 중심권에서 멀어지지 않게 붙들어야 하는 아내의 원심력을 죽이는데 꼭 필요한 내 얼굴을 보여야하는 그 추, 어느 것 하나 입김으로라고 불어서 가볍게 할 수 없는 추이기에 그 무게를 가늠키 어려워서 이렇게 하늘을 당겨 마음을 건네 본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 의식이 활동하는 한 또렷한 목표를 잃지 않았다. 그것은 내 삶에서 시련을 떨쳐버릴 수 없는 근원(根源)적 선택의 결과임을 늘 자각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런 일은 죽음의 문 앞을 들락거린 나로선 마땅히 겪어야하는 업(業)으로 여기고 달게 받아 즐거운 고민으로 여겨야함을 까맣게 잊고 허둥대는 것이다. 발걸음은 당연한 듯 역으로 옮겨가고 매표구 앞에 선 나는 선뜻 서울행 기차표를 크게 외쳤다. 이제 아무런 생각도하지 않기로 하자! 다른 두 곳의 일은 일시에 그 생각조차 멈추자! 내 몸이 가지 못하는 아들이 있는 부산과 보금자리가 있는 대구는 다음 때까지 시간의 흐름을 정지시키자! 그리고 그 때에 가서 지금에 찾은 것처럼 생각하자! 서울행 홈으로 들어오는 열차의 기적소리가 작은 김천역을 들띄우면서 함께 내 마음을 세 갈래로 찢어서 공중으로 흩는다. 조금 전에 완행이 멈추었을 때, 한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누군가를 배웅하는 것처럼 서성거리다가 차창에 팔을 걸치고서 작은 시골 역을 구경하는 신사를 응시하더니 기차가 출발하며 자기 앞을 지나는 신사의 팔목에 번개처럼 달려들어 그의 팔목시게를 낚아채고 쏜살같이 달아났다. 그 청년은 몇 겹의 철길을 가로질러서 역구내의 키 작은 나무울타리를 비호같이 뛰어넘어 멀리 사라졌다. 그 사람은 필시 나보다 좋은 환경에서 출발한, 장래성이 있는 청년일 텐데 아마도 길을 잘못들은 것 같다. 시게를 빼앗긴 승객. 그는 내가 탄 기차보다 앞섰어도 완행이기에 어쩌면 나보다 늦게 목적지에 도착할지 모르지만 머무를 곳 분명한 곳을 향해 달리고 있을 것이다. 그는 세상의 한 단면을 체험하면서 추풍령을 넘어갔을 것이다. 어려움 속에서도 털끝만치도 남에게 해 끼치지 않는 심성을 심어준 우리부모님께 감사하면서, 다행스런 지금의 내 처지를 백 번 천 번 환희의 노래로 보답하리라고 다짐할 즈음, 기차는 추풍령을 힘겹게 넘고 있었다.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