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86.021119 고민
계단의 난간은 뜨겁게 달아서 잡을 수가 없다. 폭은 좁디좁아서 어깨가 벽에 부딪기 일쑤고 게다가 턱까지 높아서 무릎을 짚지 않고는 오르기 힘 든다. 막바지 옥상 탑 방을 보여주는 주인아주머니의 눈길이 내 얼굴에 쏟아진다. 말인즉, 달랑 하나만 있는 방이라서 독채 같고 외딴집처럼 되어있으니 시끄럽지 않아 오래 묶는 데는 제격인 방이라는 것이다.
허긴 이렇게 올라오기 힘든 곳에 나 말고는 선뜻 승낙할 사람도 있을 것 같지 않은 방인데다가 오뉴월의 땡볕이 내리 쬐어 숨이 턱턱 막히는데 어느 누가 이 방에 든단 말인가? 헌데 오늘 이 집 주인은 살다 보니 별사람 다 있다는 눈치를 보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영업집 안주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대로 생각는바가 있어서 고개를 끄덕인 것도, 이것저것 고르는 절차를 즐기지 않는 내 성품 때문이리라. 해서 군소리 없이 승낙한다. 가릴 처지가 못 되기도 하려니와 회사와 지척거리인 이 숙소가 출퇴근하기에 알맞고 나대로 일을 추어 가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할 테니 그런 시간을 만들어 줄 것 같아서도 괜찮다. 더구나 시끄럽지 않아서 좋을 것 같았고, 뜨거운 한낮에 머물 이유가 없으니 그까짓 여름 햇볕이야 문제 될 것 없겠다 싶어서 망설임 없이 정하고 말았다.
나는 지금 나름의 비상 상태임을 자각해마지않는다. 이따금 물건을 챙기러 방에 들르려면 찜통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얼마나 빨리 나올 수 있겠냐는 생각부터 해야 하니 안식처가 아니라 고통과 인내를 시험하는 시험장이 되어서 나를 맞는다.
‘너는 이것도 과람(過濫)하니라!’ 과거와 미래를 꿰어 응징의 상궤(常軌)를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들리는 이 소리를 털고, ‘아니다. 너는 남들이 어떻게 여기든 상관하지 말고 품위를 지켜라! 그러면 그 다음은 누군가가 도울 것이다.’ 로 바꾸어달라고 하소하고 싶기도 하련만 나는 그럴 수가 없다. 설사 내 살점을 에고 문드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는 할 수 없는 태생이라 싶어서 더 그렇다.
이것도 분수에 넘친다. 부산의 외할머니에게 맡겨진 아들과 서울의 병원침대 위에서 독백하고 있을 아내와 대구의 ‘나간 집’을 번갈아 그리며 왔다갔다 하다보면 발걸음은 어느새 기름 먹어 새까맣게 되어버린 회사의 마당에 닿고, 이 기름 냄새를 맡으면서야 비로써 내 정신을 차린다.
모든 것이 새롭다. 이질감으로 어색하던 여러 날이 지난 지금 동료는 서로의 흉금을 터는 지경에 이르렀다. 각고(刻苦)의 노력을 기울인 결정(結晶)이다. 점심때가 되어 회사를 나온 나는 이 집 저 집으로의 홀로 매식(買食)행보의 처량한 반복을 잇고 있다. 모든 직원들이 도시락을 가져오는 것은 어제오늘에 시작된 것이 아닌, 오랜 관행인 듯, 회사 분위기를 나 때문에 흩을 수 없는 작은 고민이 점심때마다 생겼다.
꾀어내려고 하면 그들의 겸양(謙讓)에 겸양에 더욱 난처할 것이고 설혹 간간이 응한다 해도 그들의 먹지 않은 도시락이 집에 돌아간 후에 구차한 변명거리의 단초가 될 터이니 역시 주저할 이유가 된다.
점심시간의 도시락 먹기가 그대로 사는 즐거움의 하나였던 시절이 나도 있었지만 그와 비교되지 않는 행복이 그 도시락 속에 담겨있을 것 같아 부러운데, 그 부러움에 젖어 홀로 정문을 나서는 내 발꿈치를 무슨 연유로 그렇게 무겁게 끌어내리는지 모르겠다.
가장 작은 것이 가장 큰 행복일 수 있는 가르침을 받는다. 나는 도시락의 알뜰함을 커서 체험하지 못했다. 그것이 내 삶의 함축인 것을, 이 점심시간에 음미하게 되는 사고의 확장을 인정한다.
전에는 도시락 같은 건 생각 밖으로 멀리 밀려나 있었다. 한 때는 인간최소 공동체인 가정의 울타리에서 멀리 이탈해 있었던 까닭에 그렇고, 또 어느 때는 도시락 같은 건 품팔이꾼이나 차고 다니는 것으로 낮추보기도 했었다. 그것이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굴러 떨어뜨린다는 것을 뒤늦게 깨치고 있다.
도시락은 거기에 담긴 내용이 어떻든 먹는 사람은 도시락을 싼 사람의 손길이 있어 풍부한 자양 섭취가 되어 흐르는 세상살이 물밑의 자갈로 깔려서 그 물을 맑게 할 것이고, 또 마련하는 사람의 맑은 영혼이 깃들어서 그 물길에서 수조(水藻)로 자라서 흐르는 흙탕물을 걸러낼 것이지만 물위에는 뜨려하지 않는다. 다만 물속에 잠겨서, 세상 사람들의 눈길에서 멀어져 있으면서도 세상정화에서 없어선 안 될, 그것이 도시락의 진리인데 그 진정한 이치를 모르고 허둥대고 살 수 밖에 없는 나다.
곰곰이 도시락의 진가를 음미하고 싶다. 해가 뜨고 해가 지는 사이에 일하고 해가 지고 해가 뜨는 사이에 잠자는 순리를 잊는다면 삶의 어느 한 부분은 필경 나 모르게 삭감되겠기에, 여관의 옹색한 다락방이나마 마련하고 흐르는 물속의 자갈이 되고 수조가 될 혼탁수의 ‘정화(淨化)도시락’은 먹지 못할지라도 도시락 먹는 이의 깨끗한 품성을 어떻게든 닮으려는 시늉만은 절실한데, 내 손으로 하지 못하는 처지마져 덮어야하는 뜬 생활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나는 모르겠다.
나를 보는 회사사람들이 왜 그렇게 공중에 떠서 사는지를 굳이 묻지는 않아도 서글픈 내 생활에 연민을 가질 것 같아 그것이 두렵다. 나는 이런 생활이 이제까지 살아오는 삶 중에 그래도 상급의 생활임을 그들에게 알릴 이유를 댈 수 없어 고민할 뿐이다.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