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

외통프리즘 2008. 10. 3.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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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른 세월만큼이나 세상도 이렇게 저렇게 많이 바뀌면서 주거환경도따라변하였다.



이상은 허울만 남아서 쭈그러졌고 뒤틀어 친 몸부림은 물거품만 일구어 흩어지며 나는 그냥 떠내려간다. 또한 흩어지는 물거품은 허우적거리는 내 안에 젖어 녹아 눅눅히, 그나마 흔적으로 남아있다.

 

변화의 손짓에 현혹되어 코에서 단내가 나도록 뛰었는데도 내 가랑이가 짧아 세월에 못 미쳤는지, 잘못 든 길로 세월을 비꼈는지, 손만 허우적댄다. 아득히 먼 저편에서 갖가지 생활의 이기들이 아지랑이처럼 얼른거리기만 한다.

 

시골에서 살았던 모든 이가 다 마찬가지는 아니겠지만 그 때에 산 거지반이 문명하고는 등지고 살았는데 나 또한 어렵게 컸기로, 문화적 이기의 물결의 가장자리에서 언제나 서성였다.

 

동경하던 이층집이나 문화생활의 상징이던 수돗물을 처음 본 것은 초등학교 삼 학년이나 되어서였다. 군내 학교대항 어린이 운동회에 갈 때였다.

 

읍내 큰길가의 이층집, 그 이웃한 공터에 자리 잡은 공동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 이것들은 내겐 큰 볼거리여서 눈을 팔면서 걸었고 때문에 줄에서 뒤 처지곤 했다.

 

곧 읍내 학교 뒷마당 한 곳에 마련된 수돗물을 두 번째로 보았을 때 훌쩍 커버린 키에 어울리지 않게, 어릴 때 호박잎줄기로 물동이의 물을 빨아올려서 밖으로 내든 생각을 떠올리며 한참동안이나 꼭지에서 나오는 물줄기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물로 목을 축일 때, 내 입이 솟는 샘 물맛에 익숙해 있었던 탓인지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어서 입에 머금고 멍하게 한참을 있었던 기억이 새롭다.

 

들길을 가다가 목이 말라서 흐르는 봇물을 양 손바닥으로 떠 마셨을 때의 물, 그런 물 같이 미지근하다. 게다가 그 논두렁 물과도 다르게 역한 냄새조차 나는 물이었을 때, 수돗물은 내 마음에서 멀어졌다.

 

그때에는 그 물이 다른 용도로 이용된다는 것은 캄캄하게 몰랐었으니 더더욱 수돗물의 의미를 알리 만무했다.

 

수돗물에 대한 피상적인 생각을 벗은 것은 도시생활에 들어가면서부터였는데 수도는 인공적인 도수(導水)여서 거기에 따른 손길도 잦아야 되는 정도는 알게 되었지만 음료와 함께 상수기능을 갖춘 것을 알았을 때는 어렸을 때 본 그 수도꼭지가 비로써 조금씩 다시 다가 왔다. 그리고 그 수도는 우리의 섭취배설의 생리기능을 편리하게 해준다는 것도 비로써 이때 알게 되는 것이다.

 

어느 절간에 해우소(解憂所)란 이름을 붙여서 걱정을 풀어주는 곳임을 보았지만, 참으로 기막힌 이름이라고 여겼다. 우리네 인간의 생리 현상을 지극히 적절하게 표현한 말인 것 같아서 절묘한 느낌마저 들었다.

 

소에 붙어서 피를 빨아먹지만 배설은 하지 않고 자라면서 검은 강낭콩 알만하게 커서는 결국 제 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떨어져서 그 소에게 밟혀죽는, ‘가부나리’ 기생충처럼 살 수 없는 우리네 사람들이니 먹는 걱정만큼이나 크게 신경 쓰이는 일이 또한 뒷일의 걱정이리라.

 

삶에서 먹고 내는 것처럼 중요한일이 없을 것 같은데, 걸맞게 세월 따라 바뀌는 그 처리방법 또한 달라서 우리에게 흥미를 더하는데, 이번에 우리 집의 그 ‘해우소’를 개조함으로써 우리식구의 걱정을 덜고자 하건만 그게 생리적인 것보다 너무나 외관에 머무는 것 같아서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짐승은 나름대로 편리한곳을 찾아서 그 곳에서 배설하기 때문에 아무런 걱정이나 부자연스러움이 없는 반면 우리네는 그렇지 못하여 언제나 걱정을 안고 산다. 그것이 개명할수록, 도시화할수록 심해지고 소위 문화생활에 들어갈수록 고민이 되는 것이니 이게 이상하다.

 

짚어보면, 고정 장소가 마련되고 그곳을 벗어날 수가 없는, 제한된 자유로써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여기서 문명의 척도가 가늠되듯 하여 가벼운 웃음이 샌다. 즉 걱정거리를 끼고 도는 것이다.

 

우리 할머니가 일렀던, 옛날의 ‘정낭간’ 이라는 곳은 안채하고 떨어져있는데 헛간같이 생겼다. 그 안에 양발을 디딜 수 있게 디딤돌을 두 개 놓고 이를 ‘보돌’이라 불렀다. 그 ‘정낭간’이란 이름이 뒤늦게 궁금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말을 알아듣는 사람도 없고 우리말 사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우리 집만의 말인지는 몰라도 아마도 정녀(貞女)들이 가는 곳이라는 그럴듯한 홀로 풀이를 해보는데, 그러니까 농경 사회에서 농지의 한쪽에 집을 마련하고 남자들은 밭두렁 논두렁에서 보는데 여기는 그렇지 않다는 뜻의 ‘정녀간’인 듯 하고 더욱이 ‘보돌’은 보는 돌이라는 뜻인 것 같아서 해학적이다.

 

이 말 또한 나로선 정감 어린 단어다. 그것은 내 기억의 원초(原初)에서 가장 살아 맴도는 말이고, 더구나 ‘보돌’은 오랫동안 낯익은 자리인데 거기서 어릴 적 내 모든 것을 해결했기 때문이다.

 

어머니께 야단맞을만한 호주머니 속의 잡동사니 내 '개인 재산'을 적당한 곳에 숨겨놓는 궁리를 하는 곳이 이곳이고 더러는 걸터앉아서 생리현상의 진수를 낱낱이 관찰하며 걱정을 풀어대기도 했고 좀 더 커서는 꿈속의 황홀을 생시로 체험하기도 했다.

 

그대로 ‘해우소’가 되었다.

 

이런 ‘해우소’도 수돗물이 끼어 들 여지는 없었고 물은 질색으로 멀리하는데, 빗물이라도 스며들까싶어서 온갖 방법으로 마무리한다.

 

덮개를 한다든지 아니면 마른 재와 버무려서 그 형질을 고스란히 보존하여 그대로 거름으로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남들이 모르는 ‘정낭간’, 통시, 뒷간, 변소는 생활공간에서 되도록 변두리로 멀리 두었는데 이것이 우리의 생활공간의 중심으로 파고드는, 그 척도가 곧 문화생활의 가늠이 되는 이즈음에, 우리 집도 황새걸음을 흉내 내어 기어이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 표현 또한 달라져서 화장실, 욕실로 바뀌었다. 나는 애매한 이 말에 작은 저항을 느낀다.

 

분명 쓰임은 같은데 말의 뜻은 다르니, 짐작하건대 말에 따라서 그 풍기는 바를 다르게 하는 모양 같다.

 

식사하는 곳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해우소’의 이름은 향기를 더해간다. 아예 방안으로 들이고 마는 지경에 이른 이름은 ‘목욕탕’도 아닌 ‘욕실’이다.

 

이렇게 되고 보니 어디서부터 화장실인지 잘 구분 할 수가 없어서 어지럽다. 그냥 넘어가야 하련만, 그렇지 못해서 탈이다.

 

이런 뱁새혼란에 황새의 화장실을 꾸미려는데, 이제는 내가 그렇게 소외했던 수도가 내 앞에 크게 위압적으로 다가오면서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했고 마침내 수도파이프를 묻고 정화조를 묻는 대공사를 하면서 나도 문화인 황새의 반열에 오르려 뱁새의 가랑이를 넓혔다.

 

그런데, 그 문화인의 뒤를 따르려면 욕조와 변기가 붙어있고 또 기거하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수도가 문명의 필수시설임을 깨닫는, 순박한 시골뜨기의 뒤늦은 뱁새 걸음의 보폭(步幅)넓히기이니 언제 황새가 머물러 있는 곳에 닿을 것이며 찢어지는 가랑이소리를 언제까지 들어야할지 아득하다.

 

아직은 ‘보돌’형식의 ‘해우소’가 변형될 날을 점칠 수는 없다. 그냥 수돗물을 이용해서 문화생활의 흉내를 내는 것이니 그렇지 않아도 작은 뱁새의 눈에는 황새들의 걸음이 까마득히 멀어져만 간다.

 

내리는 물소리가 요란하여 뱁새 가랑이 찢어지는 소리인데 그래도 황새를 따라잡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가랑이를 넓히면서 걱정을 억지로 더러 내는, 아닌 ‘해우소’가 되었다. ‘해우(解憂)소’는커녕 걱정을 잔뜩 짊어지는 ‘부우(負憂)소’가되었구나! /외통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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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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