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28.030828 목욕2,이발
아들은 나와 함께 목욕탕에 가는 것을 마다한다. 그 이유를 제 어미를 통해서 들은즉, 아버지와 목욕탕에 가는 것이 창피하다는 것이다. 무엇이 어떻게 창피하냐는 어미의 물음에 아들의 대답인즉 아버지가 탕 안에서 큰 대자로 누워서 주무시는데, 오래 주무셔서 지루하고 답답한데 창피해서 깨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제가 창피하다는, 그것이 변이다.
아하, 아들이 이제 내 곁에서 멀어지는구나!
잠시 느끼면서, 반갑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섭섭하기도 하다. 아들이 홀로 이발을 하고, 목욕을 하고, 어디든지 다닐 수 있고, 누구와도 어울릴 수 있기를 고대했던 터에 기쁨이 넘쳐야 하련만 오히려 허전하게 고독이 밀려온다.
죽었다 살아난 아들이 어쩌면 온전한 아들이 되어가는 작은 변화를 이제까지 느끼지 못하면서 오직 그렇게 되기만을 바랐던 내 외곬 마음 씀씀이 비로써 성취되면서 기쁨과 함께 풀어지는 맥일지도 모른다.
홀로 대중 싸우나 탕으로 가면서 많은 것을 생각한다.
창피하다? 늘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아들의 독립선언이다.
어엿한 초등학생이 된 것은 어렸을 때 당한 형언(形言)하기 어려운 고비에 비추어 말할 나위 없이 기뻤는데, 아직은 어리지만 그 아들이 이렇게 내 곁을 떠나는 마음가짐이 대견하고 눈물겹다. 잊을 수 없는 이발소 드나들기, 그리고 움츠리는 머리를 바로잡느라고 수없이 애먹던 일이 떠오르면서,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이런 것인가 하여 사무친다.
그러면서, 나를 홀로 보낸 우리 아버지도 나를 대견해 했으리라고 억지로 믿으려한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 못한 아들 된 도리를 내 아들과 더불어 하고자하는 속죄의 상쇄심리(相殺心理)일 것이다.
내 생을 다해서도 갚을 수 없는 아버지께 대한 죄스러움을, 오직 행동으로만 보여주신 아버지의 가르침을 나 또한 다만 행동으로 보답했다고 변명하고 싶을 뿐이다.
집 떠날 때의 극적(劇的)상황을 덮어버리고, 경우의 여하를 따질 것 없이, 도덕적으로 흠(欠)이 되는 것을 내가 안아 들이고 거기에 지극히 이기적 자위(自慰)를 곁들여서 만족하려한다.
이렇게 수없이 되풀이하고 날마다 뇌는 나의 넋두리가 오늘 아들의 일로 해서 되살아나고 되새겨지는 것이다. 내가 자랄 때는 집에서 목욕을 했던 기억은 없다. 모름지기 더운물을 커다란 함지에다 채우고 봉당(封堂)에서 했을 것이다.
철들어서는 철도국사람들 집의 욕조거나 학교숙직실의 욕조나 교장사택의 욕조를 빌려서 땔감을 추렴해서 물을 덥히고, 번갈아 가면서 묵은 때를 불려 벗기곤 했던 그 때에 비해서 이즈음 내가 가는 넓은 대중탕은 무릉도원(武陵桃源)이다. 해서 나는 언제나 일주일동안에 싸인 피로와 세상의 찌든 때를 벗기고 또 벗겼다.
고열의 가마에서 고통을 맛보아 이기고, 살을 에는 냉탕에서 나를 대하는 세상의 싸늘한 조소(嘲笑)와 냉대에 견딜 담금질을 반복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짜릿한 희열(喜悅)에 무아(無我)의 경지(境地)로 솟아 도원에 올랐다. 아직 어린 아들은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들도 언젠가는 아버지와 같이 큰대(大)자로 누어 무릉도원(武陵桃源)을 거닐며 지난날의 아픈 상처를 어루만질 것이다. 그때에 제 아비가, 제 할아버지께 깍듯한 인사로 이별의 정을 나누지 못한 한을 어렴풋이 짐작이나마 할 것이다.
아들아! 잘 자라주어 반갑고 고맙다. 더하여 이 다음에 이 애비 마음도 헤아려 보거라!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