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많이 흘렀다. 이십 년 세월이 뇌성(雷聲) 벽력(霹靂)으로 번쩍, 내 곁을 스쳤다.
늘 아쉽게, 오늘을 마감하며 동동거렸고 내일을 위해서 숨을 죽였다. 진지한 명상 한번 못했고, 한가롭게 영화 한 편 감상하지 못했다. 연극이나 음악은 엄두도 못 내고 아예 내 속셈 밖으로 제쳐놓았다. 내 옆은 언제나 어둡고 탁하다. 호화스럽기만 한 이런 것들은 꿈길의 저쪽에서 아지랑이를 피울 뿐이다.
내리사랑은 오래전에 사그라지고 옛날의 정감이 어색하기만 한 오늘의 처 이모, 장모님을 대신해서 우리의 울타리가 되었던 이모를 비로써 뵙는 감회가 새롭다. 더욱 성하지 못한 몸으로 우리 집을 찾아오셨다니 내 마음이 만 가지로 엇갈린다.
그토록 날 두둔하고 감싸던 처 이모도 이제 나를 돕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받으러 오신, 기막힌 전락(顚落)을 난 믿을 수가 없다. 나이를 이기지 못해서 병들었다고 하기엔 아직 환갑을 맞지 않은 중년이니 고개가 저어지고, 쇠잔하여 병마를 이기지 못했다고 하기엔 고난으로 쌓아 다진 옹이진 체력이니 이 또한 믿어지지 않아 손을 젓는다.
그런 처 이모가 병마와 싸우려 여기까지 오셨다니 그 병은 심상치는 않은 병 같고 내색을 안 하는 것으로 보아 더욱 깊은 사연이 있어 뵌다.
며칠이 지난 뒤에야 아내를 통해서 들었다. 처 이모께서 중병을 앓고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돈도 있고 명성도 누리고 아들딸을 다 키워 따로 내놓았는데 무슨 업(業)으로 병고에 시달리는지. 안락(安樂)은 곧 소멸(消滅)의 길임을 암시하는 것인가. 어슴푸레 더듬어 본다.
영화(榮華)의 끝이 이렇다면 난 그 길을 애써서 외면하고 싶다. 과연 그 영화란 어디에 깃들어 있는 것인지 그것조차도 아리송하다. 남이 보기에 따라 영화가 가늠되는지. 자기 내면에서 영화를 누리노라고 믿는 것인지. 그것도 모르겠다. 아무튼, 일할 때는 아무 탈이 없다가 살만하면 병드는 보통 사람들의 넋두리는 또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가 하여 심각하게 되새겨지는, 처 이모의 자태다.
당당한 이모의 태도와 의지를 전처럼 읽을 수가 없다. 마루를 지나 화장실로 향하는 걸음걸이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도도하도록 자신만만하고 티끌 하나 묻을 수 없는 정숙한 자태와 걸음은 볼 수 없고, 왠지 어깨가 흔들리며 팔과 다리가 엇가고,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럽다. 몇 발짝 띄다가 곧 이런 것을 알아차려 감추려는 듯, 의식적으로 네 활개를 치면서 걷는 품이 지켜보는 나를 안쓰럽게 한다.
집안에서조차 나를 피해서 행동하셨을 테지만 공교롭게 내 눈에 띄고 말았다. 나도 이모도 발길을 다시 돌릴 수 없도록 거의 동시에 마루에 돌출했으니 피할 길은 없었다.
이 한 장면에서, 많은 말을 듣고 있다. 곧, 처 이모는 변함없는 옛날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고, 비록 지금은 이렇게 조카에게 기거하면서 체통을 잃고 있지만, 반드시 옛날의 영화를 되찾으리라는 굳은 결의를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조카사위에게 자기의 초라한 모습을 추호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이다.
처 이모의 이런 생각은 아무것도 없었던 나를 아내와 맺어서 살게 한, 우리 삶의 밑바탕임을 고려하여 더욱 당당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 우리 할머니 우리 형제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하는 내 옭은 삶에서 이모는 나의 심정적 대리모로서 내가 어찌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대리 만족시키는 작은 구멍을 뚫어준다.
멈추어 버린 어머니의 그림이 지금 내 앞에서 실체(實體)화되어 어머니의 실상을 보게 하는 것이다. 우리 어머니는 뉘 집에서 병구완을 받고 계실까. 과연 내가 못 한 한 맺힌 위로의 말 한마디를 내 혈육 동생이나마 살아서 하고 있을 것인가? 아무렴, 효성스러운 동생이 어머니를 반드시 모시면서 위로할 것이다.
자문자 담화며 방문을 닫았다.
이 바쁜 아침의 짧은 시간에 이십 년 삼십 년 전의 긴 세월을 줄이는 나만의 또 다른 세계를 몸조리며 보고 있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