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51.040110 기도
안개 속을 헤쳐 가듯 살아온 나의 삶에서도 지척(咫尺)을 분간할 수 있을 만큼의 귀가 열렸고 발걸음을 옮길 만큼 눈이 뜨였고 무언가를 잡을 수 있을 만큼 주위가 보였다.
이것이 내가 사는 세계다. 나는 오감이 닿는 만큼만 내 영역으로 삼아 거기에서 비벼 살면서 조금씩 둘레를 넓힐 수가 있었다. 그렇다보니 가족에 대한 사랑도 옹색하게 되었고 나 스스로에 대한 자존도 그렇게 -자학에서 벗어날 날이 없는- 그런 집안을 꾸려갔다.
그렇게 살아가면서도 마음을 둔 한 곳이 있으니 그것은 혈연(血緣)이다. 그 혈연에 대한 집념의 표현이란 것이 겉으로는 남들과는 비교 될 수 없을 만큼 얕고 희미할지언정 내심 아들에 대한 의미는 크고 깊고 넓기만 하다.
사회활동에서의 좁은 영역을 벗어날 수 없는 내가 사고(思考)의 영역이라도 넓힐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 사고가 온전히 남의 영역만은 침해하지 않는 절대성을 가지고 있는 때문이고, 그것은 또한 나를 옭아 죄는 물리적이거나 사회적인 것이 아무리 심해도 내 영혼의 영역까지는 말살하거나 침해할 수가 없다는 신념 때문이다.
내 힘의 한계가 뚜렷하여 넘볼 수 없는 세상, 이상을 저버린 채 오늘의 삶만이 오직 전부였던 나는 나를 최소한으로 줄여서라도 존립의 형태만은 지켜나가야 할 소명이 있다고 늘 생각했다.
그 소명은 조상과 후손의 사이에 있는 나를 소멸시키지 않는 일이다. 이런 소임을 조상이 몸속에 심어주지 않았을까! 가르쳐주지 않았을까! 하여 은연중 본래의 나를 생각하게 되고, 그리하여 조상의 얼을 늘 잊지 않고 살았다.
조도(照度)는 언제나 내 발걸음을 떼어놓을 만큼만은 밝았다. 그만큼 나를 움직이게 한 것은 내 자각의 샘에서 끊이지 않는 자아의 인식, 조상의 뿌리에 둔 그 인식 탓일 것이다.
그렇게 믿는다. 수없이 많은 조상들의 끈이 이어져서 내 오늘이 있겠기에, 하루도 쉬지 않고 그 뿌리들의 각 세대마다 그들에게 있었을 그들의 오늘을 다음 세대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의지로 살았을 것이기에, 나를 돌아보는 오늘의 나도 역시 내 후세를 위하는 것만이 내 존재의 전부가 될 것이란 생각에 이른다.
숙연하고 겸허하게 나를 본다. 그래서 내 오늘의 삶은 아들이 그의 삶에서의 오늘의 매순간을 풍요롭게 하는 것만이 내가 이 세상에 있는 이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이르게 되었고 이 도리를 다함이 바로 내 존재이유임을 깨닫게 되는데, 아스라이 먼 옛날의 조상들이 살았을 진지한 삶을 이어 다음으로 이어가는 가장 원초(原初)적인 삶이 오늘의 내가 살아야 할 자세일 것이라고 여긴다.
나는 한 발자국의 내디딤도 결코 소홀할 수가 없다. 소중하고 의미 있는 이 작은 발자국에 내 모든 것을 걸어도 허물이 안 될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든지 끈을 이으려고, 끊기지 않게 하려고 마음에 다지고 또 다지면서 아들의 성장을 빈다.
아들이 먼 훗날의 후손이 아들을 기리는, 그런 한 매듭으로 남아서 더불어 기리고 이어가는 ‘나’를 이어주기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이 아침을 열고 있다.
안개는 어쩌면 내 삶의 전 과정에서 걷히지 않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계속 생명의 숨을 쉬며 헤쳐 나갈 것이다.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