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분

외통넋두리 2008. 11. 5.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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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

5572.040612 두 분

 

내가 할아버지를 뵐 때마다 할아버지는 나를 먼 옛 고향 땅에 실어 날라다 주신다. 서 계서도, 앉아 계서도, 그런 대로 할아버지만 뵈면 그렇다.

 

열댓 해 남짓한 차이인데도 할아버지벌이 되기에, 그것만으로도 고향을 할아버지께 옮겨온 것이나 진배없다. 할아버지의 몸가짐이 고향에서의 차림을 그대로 따르고 계시니 나는 앞에서는 내색 못하고 그저 즐겁다. 또한 나는  이런 내 모습을 감추기에 바쁘다. 할아버지는 팔순인데도 아직 양복 윗도리 왼쪽 위 주머니에는 만년필을 꽂고 나들이하신다. 할아버지는 알 수 없는 마력이 그 만년필에 깃들어서 순식간에 나를  고향의 산과 들로, 정겹게 늘어선 초가집 처마 밑으로 걷게 한다. 할아버지의 바탕은 아직 자랄 때의 그대로인 듯, 걸으실 때면 백발이 성성해도 어깨는 흔들린다. 짓이 나서 우쭐대는 어린애의 마음으로 가득해 보이니 나를 더욱 어린 시절로 끌어당기고 계신다. 이 할아버지조차 안 계셨던들 나는  황량한 벌판에서 잡힐 듯 안 잡히는 추억의 무지개를 향해 몸부림으로만 안타깝게 허우적댔을 것이다. 고맙기 그지없는 나의 할아버지는 나를 지금도 당신의 동생으로 착각하실 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단지 오래오래 해로하셔서 나를 언제나 젊고 푸르게 잡아두었으면 하는 욕심에 가득 차있다.

 

할아버지는 우리집안의 족보이야기만 나오면 마치 잊었던 고향의 형제를 찾은 양 흥분하신다. 그럴 때는 마치 어린이처럼 되어 지금이라도 곧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흥분하여 기뻐하신다. 그러나 이를 낱낱이 설명하기엔 우리집안과 한동안 너무나 멀리 떨어져 계셨던 할아버지인 탓에 생소한 모든 것을 일일이 설명하는 데는 시간이 너무나 부족하다. 해서 희망을 잃지 않도록 조심스레 풀어드리지만 내 인내가 부족하여 언제나 할아버지에겐 서운한 만남이 되곤 한다.

 

나는  감당 못할 앞날을 점칠 수 없어서 언제나 주저하면서 할아버지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곤 했으니 또한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내 한이 되고 말았다. 기왕에 할아버지는 속속들이 모르시는 것인데 할아버지 마음이라도 흡족하게, 잘 되노라고, 아니 가설의 가승(家乘)이라도 만들어 안겨드렸더라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지금은 내가 설명조차 할 수 없는 하늘나라에 계신 할아버지께 무엇이라 변명하랴! 모름지기 지금은 모든 시름을 잊고 계실 것을, 생각하면 내 옹색한 처신을 몹시 한스러워 뜯어 움켜쥔다.

 

일가 두 집안의 어른을 모신 나는  그나마 무척 행운이라고 여기고 심정적으로 위로 받는다. 내가 어려서 졸졸 따라 다녔던 형은 지금 두 손과 두 발이 집안의 우환으로 묶여서 있으니 고향조차 그릴 엄두도 못 내고 계시지만 알뜰히 모시는 형수님의 그림자로 삶의 보람을 찾고 계신다. 하지만 때때로 나를 만나시면 아무 말씀 없이 가느다란 한숨만 쉬신다. 그 들릴까 말까한 숨 속에 말씀을 담아서 내게 진하게 전하신다. 지금은 어쩔 수 없으나 언젠가는 형님의 영광을 찾으리라는 희망을 말하는 것 같다.

 

두 분의 삶이 이승과 저승으로 갈리어 나의 망향의 섧음을 달래고 위안이 되는 커다란 기둥으로 우뚝 서서 나의 얼마 남지 않은 삶을 그나마 지탱해준다고 여겨서, 긴 세월을 용케 이어온 끈질긴 내 생을 이끌어 주셨다고 여겨서, 훗날 내가 이승에서나 저승에서나 두 분의 은덕에 고개 숙이리라.

 

아직 맺지 못한 족보의 결말을 이승과 저승의 두 분께 반드시 들려드리리라는 다짐도 해본다.

 

남 보기에 하찮은 것일지라도 내겐 무한의 힘을 주고 긍지를 안겨 주고 삶을 살찌우는 이 일이 성사되길 지하에 계신 어른들께 빌어마지않는다. 그리하여 훗날 나 또한 이승을 떠날 때 떳떳해 지리라.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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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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