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들 목 장군
6474.020831 구들 목 장군
사람은 누구나 자기목적을 이루면 만족하여 편안하게 쉬면서 다음목표를 설정할 때까지 무력하게 지내는지, ‘에이꼬’는 오두막집 한 칸을 마련하고는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 해를 보내면서도 잘하는지 못하는지 도무지 자각하지 못한다.
몸이 불편한 것이 이유이긴 해도 불편한 몸을 다스리기에 따라서 좋아질 수도 있으련만 육신의 움직임을 적게 하고 시 청 후 미 지각의 목 위에 있는 기관의 활동을 조화롭게 버무려서 입으로 토해 냄으로써 삶의 보람을 찾는다고 여기고, 그렇게 해서 뜻을 이루려는 지각을 우선하는 쪽으로 가려고 한다.
이렇듯, 알건 모르건 목 아래에 붙어있는 손발과 몸뚱이를 놀림으로써 삶의 보람을 찾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나처럼 내 몸을 움직여서 비로써 보람을 찾는 유형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아직 복하고는 멀리 있는 것 같다. 어느 한 유형을 한 평생을 붙박이로 이어갈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텐데, 어렸을 때는 누구나 목 아래의 놀림으로 보람을 찾지만 장년이 되면서 되도록 그 활동을 목 아래의 사지는 제한하려들고 그 대신 목 위로 올리고 싶은 욕망과 충동이 엇바꿔 들것이다. 하지만 처지가 그렇지 못해서 마음에 담아 두었다가 노년이 되어서야 실행하며 육신을 되도록 움직이지 않으려하고, 아끼는 사람은 목 위의 머리 주변에서만 생활기능을 다함으로써 보람을 찾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자기 뜻과는 다르게 점점 더 쇠잔해지며 불행은 커가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고서 거의 모든 사람은 이 길을 택한다.
헌데 젊어서부터 이런 길을 가는 사람이 우리 사는 세상에 태반이니 이들도 우열의 판단기준을 어디에다 두어야하는지를 잊고 목 위의 활동만으로 우성의 유지와 확보가 보장되리라는 생각, 여기에서 비롯되어서 지위가 높아질수록, 부가 축적될수록, 목 위의 움직임을 주로 하는 경향에서 그들은 쉬 늙고 퇴화되어 가는 것이다. 남을 부리는데 보람을 두고 남이 나를 우러르는데 행복의 기준을 두고 남과 아우르지 않는 곳에서 기쁨을 찾고 남의 눈을 모으는데서 의기(義氣)를 찾으려고 했을 때, 벌써 거기에 죽음의 그늘이 와 닿고 있음을 모를 것이다. 허긴 이를 깨닫는다면 그 순간 그의 움직임은 목 아래의 사지로 옮겨갔을 것이니 애석할 따름이다.
자기 안에 우주를 만들어서 지배하려고만 한다면 모름지기 그는 벌써 이 세상 경쟁에서 도태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 난 본연과 다르게 살고 있기 때문인 것은 우리의 성장과정에서의 신체적 활동을 생각한다면 자명해진다.
사람은 연령과 걸맞게 꾸준한 육체적 활동을 함으로써만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인데 이런 이치를 아무리 일러주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에이꼬’는 늘 몸을 덜 움직이고, 마치 자기 말 한마디로써 주위의 모든 것이 움직이며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소원인 듯이, 기회만 있으면 눕고 짬만 나면 누구든 불러서 도움을 청한다. 세상을 수월하게 살려는 '에이꼬'는 내일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처럼 오늘이 우선이고 오늘이 편하면 된다. 당장이 편하다면 앞날은 염두에 두지를 않는다. 위험에 처한 자기의 몸 관리를 자연 순응적으로 했으면 좋으련만 위험의 자각은 꼬집어도 느끼지 못하니 표본을 보이려 더욱 사지의 움직임으로 정진하는 나는 더더욱 강건(强健)해지고 돌처럼 단단해지는데도 정작 바라는 ‘에이꼬’는 '구들 막 장군'이 되어서 천하를 호령한다. 끊임없는 권고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타이르고 또 타일러도 막무가내다.
평안한 하루하루가 무료하다 못해서 권태로 이어지고 나가서 마음의 병이 생기면서 육신의 마비로 이어질 텐데 내 위상이 전문적 지식을 인정받거나 아니면 그 방면에서 권위의 상징인 인증서라도 있다면 받아들일 것인지, 도무지 무딘 내 식견으론 ‘에이꼬’의 타성을 예리하게 들추어 수정할 수 없어서 가슴을 친다.
‘아끼꼬’야 물 좀 떠오너라. ‘미나’야 비 좀 가져오나. 여보! 연탄 좀 갈아주셔요. 종이 장처럼 얇지만 송곳같이 날카로운 음성이다. 두 겹으로 된 색종이처럼 부드럽고 포근하던 음성이 사느라 얼마나 시달렸는지를 음색이 그 값을 매겨서 내게 들려준다.
‘장군’의 목소리가 어쩐지 멀리 퍼지질 않는다. 그래서 내가 ‘구둘 막’으로 달려가서 귀를 기울인다.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