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원

외통궤적 2009. 2. 6.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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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04.071122 신원

내 생의 한 획을 그은 그 친구를 만났다. 남들이, 좋았다고 하는 젊은 세월을 허우적거리며 다 흘러 보내고 난 뒤지만, 곡절 끝에 친구를 만날 수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것은 그리움과 아쉬움을 섞어 움켜쥔 채로 생을 마감하지 않으려고 했던 내 흔적이었기에 스스로 값지다.

그렇게 그리던 친구를 늘그막에서야 찾았는데, 그렇게 보고 싶었어도 제대로 이어질 끈조차 없어서 못 만났던 사람을 이제야 만났는데, 헤어진 뒤 끝은 그다지 개운하지 않다. 다만, 그 만남은 서로 흘러간 시간만 확인하는, 그런 자리가 되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용하게도 끊이지 않고 이어진 내 삶이 보람 있어서, 그 기다림이 농익어서 만날 수 있었다고 여기니, 인생이란 참으로 질기고 질긴 인연을 엇섞어가는 것인가 싶어서 한편으로는 숙연해진다.

인연. 그것은 지나온 내 발자국마다에 한숨으로 새겨진 삶의 무늬였기에, 집 떠날 때부터 가슴에 품은 간절한 마음이었기에, 아름다워야 했고 또한 끈적여야 했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 저 깊은 곳에 잠겼다가, 옆 돌아볼 겨를 없이 지냈던 긴 굴을 지나서야, 비로써 이제 어렴풋이 잡히지 않는 지난날을 더듬어 찾아냈기에 진하고 화려해야 했는데, 마냥 허전하기만 했다.

이렇듯 내 꿈의 실현은 잠겼던 내 마음이 동해서 이룩되었으니 몸이 마음에 따랐음이다. 훌훌 다 털고 아무 인연 없이 처음 만났을 때처럼, 아내를 잃은 홀몸이 되어서야 그 친구를 찾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그 '전우'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뜻밖이다. 나처럼 대처로 나가서 살고 있으려니, 아니면 멀리 떠나서 다른 곳에라도 뿌리 내리고 살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얼굴을 보게 되었으니 더욱 반가웠다. 이번 만남은 내 인생 고난과 희열의 쌍곡선의 접점에서 맺어지는, 많지 않은 인연이었기에 놓칠 수가 없었다. 세월을 더 이길 수 없게 되어서야 겨우 보고 싶은 사람을 보려는 것 또한 내 몸부림이었다. 한낱 내 사치스런 꿈이었다.

보고 싶은 얼굴을 보아야 할 때를 더는 미룰 수가 없어서 전화로 친구의 생사를 확인하려, 그 소재를 확인하려 마음을 다잡고 수화기를 들었지만 막상 상대의 전화번호조차 모르니 막막했다. 몇 해 전에 서울에서 전화한다면서 알려준 '강태홍' 친구의 전화번호는, 적힌 수첩이 들어있는 가방과함께 어는 여행길에서 통째로 잃어버렸으니 생 땅 파기로 찾아야 한다. 그래서 이 일을 처음부터 풀어내기로 했다. 그리고 실행했다.

우선 전화번호 찾는 길을 더듬는데, 행정구역의 끝자락인 면사무소에 그의 이름을 대면서 소재를 알려달라는 부탁을 했지만 알 수 없다기에, 이장님의 집 전화를 알려달라고 해서 알아보았더니 뚫렸다. 역시 행정력의 덕이다. 이장은 공인의 한사람이기 때문이리라. 해서 이장에게서 내가 찾는 친구와 친구의 사위의 전화를 알아내고 나서 전화를 해 보았다.

예전 목소리의 친구는 아니다. 마누라는 죽었으며 자기는 뇌경색으로 어찌 되고, 그래서 병원에 얼마를 있다가 왔다는 둥, 전화에서도 늙은 이의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방문 의사를 밝히고 나서, 전화를 끊고서는 바로찾아가는 길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 친구가 있는 곳은 내가 그 고장에 있을 때에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오지였기 때문이다.

어설픈 실력으로 컴퓨터에 물어보고 뽑아서 준비했으나 쉽지는 안았다. 내 조급한 선입견이 약간의 차질을 빚었다. 이런 곡절 끝에 대구의 친구는 찾았지만 앞으로 갈 길은 구체적으로 대구의 친구도 나도 모르는 청맹과니들의 여행이니 흥미는 배로 더하고, 동심의 늙은이 둘이 신나게 달리지만 차질은 수없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 것이 오히려 더 재미있었다. 아무렇게나 달리고 되돌리고, 묻고 또 물으면서 달리고 헤쳤다.

대구의 친구가 만날 시골 친구는 셋이고 내가 만날 시골친구는 하나이지만 그 하나의 무게가 셋 친구의 무게 보다 더 내게는 무거웠다. 그것은 날을 잊고 달도 잊고 해(年)도 잊고 시절도 잊은 채 지내는 내 생활에서 잡힌 기쁨이지만 나는 그 때를 놓치고 말았기에 아쉬움이 더했다. 그 친구가 서울에 올라와서 네게 전화를 걸었었는데 내가 아내의 병간호 때문에 그를 만나주지 못한, 그 빚이 ‘신원’을, 정확하게는 ‘거창’을 떠난 지 오십 년 동안이나 이어졌으니 보고 싶은 마음에다 더하여 내 어깨를 무겁게 누르고, 더하여 많이도 변했음직한 그 고장을 보고 싶은, 어쩌면 내 되 돌아가는 손을 잡았고 헤어졌던 그, 보고 싶었던 마음의 총화(總和)가 나를 그리로 이끌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나는 빚을 갚았다. 나는 양심의 빚을 털었다. 나는 내 밟아온 길목에서 나와 손잡았던 모든 사람들을 한 번씩 맞나 보고 싶었는데, 이제 그중 한 친구에 대한 재회의 충동을 잠재울 수가 있었다.

이제 대구 친구를 간신히 찾아 그와 함께 대구를 출발했다.

그 옛날에, 출장 중에 들렸던 ‘봉산’면소재지의 동네는 푸른 호수 속에 가라앉고, 이름만큼은 버릴 수가 없었던지 그대로 이어 쓰고 있다. 떠 옮긴 듯한 새 집들이 산턱에 죽 매달려서, 조상들이 살던 집터를 푸른 호수 속에서 더듬어 찾고 있는 듯 했다. 덩그러니 올라앉아서 물속을 내려 보는 새로 지은 집들은 그 후손들의 업적을 물속에다 고유(告由)할 수 없었던지, 새로 사당을 짓고 아뢰는 시제자리에 마침 우리가 초청되어 함께 음복하는데, 그 자리가 내 고향의 시제자리였다면 내 소원이 하나 풀렸을 것이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지만, 같이 간 친구는 그런 내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

나는 일체를 내색 할 수 없다. 내 어릴 때로 돌려주는 친구의 마음이 고마우면서 실향의 처절한 삶을 어쩔 수 없어 현실에 버물어서 승복하지만, 나는 다만 억울할 뿐이다.

고향이 묻혔어도 떠나지 않는 망향, 푸른 호수를 깊숙이 바라보는 그 그리움이 시퍼렇게 응어리져서 발길을 옮길 수 없었던 이곳 ‘봉산’면 주민들의 마음에다 내 망향의 절통함을 담아보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보아도 동네가 있을 자리가 아님에도 붙들어 맨 것처럼 자리한 집터, 이런 집들이 앞으로 내가 가볼 수 있는 나의 고향 마을과 대조되면서 작은 위안을 얻는다.

우리 고향 땅은 그래도 저렇게 시퍼런 물속에 수장되지는 않았을 것이란 바람이다. 내가 밟고 다닌 그 땅 그 언덕 그 갱(강)변의 제방이 그대로 있겠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은 한숨으로 달래본다.

함께하는 대구 친구도 역시 나와 비슷한 시기에 ‘신원’면에 있는 친구를 마지막 보았으니, 그 친구가 보고 싶었던 터라 시제 밥상을 물리고 바로 다음 친구의 소재를 물어서 옮겨가는데, 그 쪽 전화로는 자기네 집이 길가에 있고 자동차가 놓여있는 곳이라는 전화를 옆에 앉아있는 대구 친구가 받으면서 내 손에 잡힌 핸들과 제동장치를 간접 조정해 나갔다. 고개를 넘으면 온다는 그 고개가 어떤 고개인지를 알 수 없으니 수 없이 고개를 넘다보니 이번에는 한참을 지나갔다는 것이다. 아무렴, 유람삼아 다니는 길이니 그래도 나는 즐겁기만 하다.

한참을 되돌아가서 기어이 찾아냈는데, 웬걸 길 갓이 아니고 찻길에서 몇 개의 텃논 논배미를 사이에 둔 건너편 동네임이 드러났다. 과연 거기에 어떤 노인이 뒷짐을 집고 서있는 것이 아닌가. 단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오십 년이 지났지만 얼굴의 윤곽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머리가 희고 얼굴에 세월을 이긴 골이 깊게 길게 패여 있을 다름이다. 그런데 몸놀림이 부자연스러워서 대구의 친구가 다그치듯 묻는다. 그 물음에 서슴없이 대답은 하지만 어눌하기 그지없었다. 왈, 온갖 병원에서 검사받고 치료해도 부자유스럽게 된 몸의 병명을 알 수 없다면서 아직도 찾고 있다는 것이다.

무식한 내가 진단하기에는 효율적인 운동부족인 듯싶은데, 내뱉고 싶은 한마디를 꾹 참으면서 혼자 새겼다. 나보다 손아래인 그 친구는 한동안 공직에도 있다가 곧 교편을 잡고 평생을 지내면서도 몸 관리는 소홀히 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지만 별 수 없다. 이제 친구는 아무 일도 못하고 그저 작은 입만 놀릴 뿐이다. 이런 것을 알 수 있었던 확실한 눈대중이 있었다.

우선 허리가 구부러진 아내의 노고가 말해주고 뒷마당 뒤의 언덕에서 하늘 높이 솟은 감나무에 탐스럽게 뭉쳐 달린 감을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이웃의 감나무는 가지만 앙상하게 까치밥 몇 개와 겨우살이 몸살을 늦게 앓는 이파리 몇 개가 가지 끝에 달려있는 것으로 보아 감 딸 때가 지난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에 부인에게 내가 물었다. ‘저렇게 감 풍년이 든 감을 언제 따려고 아직 놓아두십니까? 혹 홍시를 만들어서 떨어뜨리려는 것은 아닙니까.’ 하면서 너스레를 떠는 기가 막힌 물음을, 어린애 같은 물음을 흘리지 않고 ‘저 대로 그냥 해를 넘긴다.’는 한숨 섞인 대답이다.

놀랍다 . ‘이전에는 머슴들이 땄지만 지금은 나무에 오를 사람도 없고,’ 해서 그대로 놓아둔다는 설명이다. 과연 시골은 손이 모자란다. 저렇게 지천으로 있는 감을 그냥 놓아두고 썩히다니!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입지를 바꾸어 보았다. 내가 이 집에 산다면 저 감을 어떻게 딸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니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우선 작대기를 들고 일분 동안을 올려볼 수 없으리만치 높이 매달린 저 감을, 밤나무처럼 털어서 떨어뜨릴 수도 없으니 하나하나 가지를 꺾어서 내려야 하겠는데 나로서는 도저히 한두 개 말고는 더 거둘 엄두가 나지 않을성싶다. 그대로 매어놓고 감나무 밑에 누어서 입 벌리는 수밖에 없으리란 생각이 들면서 세상이 이렇게 되었구나하고 나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먹을 것이 지천으로 있는 농촌이지만 사람은 거동이 어려운 노인들뿐이다. 나를 되돌아보게 되는 시점이다. 나도 저런 감나무처럼 버려진 사람이 되지나 않았나 싶어서 더욱 서글퍼지는 것이다.

시골의 인심은 여전히 후하고 순수했다. 며칠 전부터 연락이 되었듯, 술과 떡이 푸짐하게 나왔지만 앞서의 시제 밥으로 채운 배가 얼른 음식에 손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친구의 뜻과 성의를 외면 할 수 없으니 몇 번은 젓가락질과 술잔을 들었다 놓아야 한다.

일어섰다. 내외가 사는 본 채만 겨우 윤기를 잃지 않아 사람의 손길이 닿고 있음을 느낄 뿐이다. 헛간이나 뒷마당은 몇 년을 묵혔는지 몹쓸 농기구와 묘판과 허드레 것들이 아무렇게나 널려있어서 손이 가지 않은 티를 고스란히 말하고, 앞뒤로 무너진 흙벽과 아예 벽채로 안고 넘어진 문짝이 그대로 있으니 물어보지 않아도, 말하지 않아도 친구의 건강을 알 만하다. 그렇지만 단 한마디 하는 말은 농사를 짓고 있다는 그 말을 빠뜨리지 않았다. 많은 집이 이렇게 농촌을 지키는 노인들로, 겨우 그 마을의 이름만을 이어가는 것이다. 내 나이와 걸맞게 몹시 쓸쓸해 보였다.

친구의 친구는 더 먹으면서 쉬었다 가라는 권고를 잊지 않았다. 그는 외로운 외딴섬 같은 이곳 농촌 마을에서 쓸쓸히 지내면서 도회지에 있는 친구가 찾아 왔음을 몹시 반기고, 그런 나머지 우리의 떠남을 매우 섭섭해 했다.

예전 시골 같으면 자지러지듯이 짖어대는 개소리에 발을 멈추고 꼬꼬댁거리는 닭소리에 귀가 틔고 돼지 밥통 뒤지면서 꿀꿀거리는 소리에 동네가 시끄러웠으련만 이런 집짐승의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마치 마을 전체가 소개(疏開)된 듯, 그런 마을이었다. 그렇게 이후 들른 어느 마을에서도 이런 짐승의 소리는 들어볼 수가 없었다. 농촌은 나이 많은 노인들의 '고래장' 터가 되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떠났다. 물에 잠긴 옛 길은 가늠할 수 없다. 산등성이를 뚫은 낯선 길을 따라서 갈 수밖에 없었고 갈림 길을 만날 때마다 차에서 내려 방향을 확인하고 갖고 온 약도를 들여다보면서 다시 산골짝으로 올라갔다. 좁은 골짝을 올라가다가 하늘이 훤히 트이고, 예전 집들이 나타난다. 비록 길은 포장돼서 낯설지만 산과 골짝 형세가 내 차를 멈추게 한다.

정자나무가 낯익다. 마을을 알리는 표석이 내 눈을 확 뜨이게 한다. ‘양지리’ 평생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이곳에 내가 잠시 머물게 되었던 그 연유가 아로새겨진 그 전우의 집이 있었던 곳이다. 옆자리 친구에게 이곳에 나중에 들릴 것을 의논하고서 바로 길을 이어갔다. 오십여 년 전의 기억을 더듬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길조차도 긴가민가하게 되어 또 갈림 길에서 차를 세우게 되었다.

여긴가 싶지 않게 산허리에 달아 맺힌 동네다. 트인 길에서 언덕을 오르는 마을길도 예전에 지게지고 올랐을 성싶은, 그런 길은 아니다. 소와 사람의 발길만이 오가던 시골 길을 시멘트로 덧칠해서 겨우 차 한 대가 양 바퀴를 걸칠 만큼 넓혀 놓았다. 좁디좁다. 여느 동네처럼 역시 곳곳이 포장은 되어 있어서 들어가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한 참을 더 갔다. 마을 입구에 차를 세워두고 대구 친구와 함께 ‘강 태홍’의 집을 찾았고 이내 차를 몰고 천천히 비집고 고갯길을 올라갔지만 마당에는 차를 댈 수 없었다. 한다 한 시골 양반네 집의 전형처럼 장애물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모름지기 이 마을의 개척 씨받이인 듯하다. 그러기에 언덕위에 있으면서도 움직이질 않았을 것이다

친구는 몰라보게 쇠잔해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왜 그렇게 늙었느냐’면서 ‘예전에 그렇게 곱던 얼굴을 다 어떻게 하고 이렇게 늙은 얼굴이 되었느냐’면서 울상이다. 어지간히 몸 사리기가 힘들었던지 누웠다가 일어난 사람처럼 수염이 희뿌옇게 얼굴을 덮고 있으면서 나를 원망하는 품이 세월의 흐름을 보게 한다. 셋이 다 늙었으면서 서로를 애처롭게 바라보는 마음. 마음이 가슴을 저민다.

아, 시절이 이렇게 사람을 다르게 만드는구나 싶어서 몹시 안타까웠다. 서울에서 산 작은 선물이 들어갈 냉장고도 없나보다. 나중에 알았지만 아내를 먼저 보내고 홀로 살면서 이웃의 일가의 부인네들이 마련해오는 조석으로 명을 이어가는 것 같았다. 그래도 기는 살아 있는지 아직도 지역에서 자기가 무슨 ‘위원’이라는, 알아들을 수 없는 옛날 옛적 직함을 들먹이면서 기를 편다.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하면서, 병원 신세를 오랫동안 지고 왔다는 말을 몇 번이고 되 뇌이면서, 시골에서 만 볼 수 있는 노인 중에도 상노인 행세를 하고 있다. 심신이 굳어질 수밖에 없겠다는 지레짐작을 하게한다.

감 몇 개를 내 놓았다. 이 감이 친구로서는 멀리 대구와 서울에서 온, 그것도 오십 여년 만에 온 두 친구를 맞는 최선의 맞이었다. 말솜씨는 조금 어눌해도 억양이나 장단이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어서 그나마 옛날을 되 새 길수 있었다. 방에 걸어놓은 젊었을 때의 상반신 사진이 옆에 앉아 있는 친구의 실물 얼굴 크기와 같아서, 번갈아 보게 된다. 그렇게 보게 되어, 옛날과 이제를 비교하면서 또 세월을 겹쳐놓고 있는 나는 늙지 않은 것으로 옹벽을 치고 생각하고 있으니 생각하면 우습기 그지없다. 자화상을 볼 수 없으니 친구만 가엾을 뿐인데 친구는 날더러 늙었단다.

늘 그날이 그날 같은, 날을 보내면 얼마나 좋을까! 육십 년 동안 꼬깃꼬깃 꼬불쳐놓은 옛 기억이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기대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허전함은 온전히 내 ‘소아병’인가! 나만의 병인가! 아무튼 나는 내 마음의 한 구석에 남아있는 앙금을 걷어내긴 했다.

서운하고 허전했다. 어느 누구도 나와 함께 차타고 나가서 호젓이 옛날을 되새기면서 늘어져서 가물거리는 세월을 당겨볼 고향친구는 없다. 그림으로 보듯이, 움직이는 구름을 바라보듯이, 상상해 볼 뿐이다.

발길을 돌려서 왔던 길을 더듬어 가려는데 불현듯 가보고 싶은 곳, 내 마음이 끌리는 곳이 있었다. 그 곳은 이 언저리에 있음을 동행하는 대구 친구에게 올 때에 말한바 대로 그 곳에서 한번쯤은 둘러보고 싶은 곳이었기에 머뭇거리고 있는데 마침 길이 세 갈래 길로 되었으니 어찌할 수 없이 멈추어서 자세히 알고 떠나야 할 판이다. 행선지는 대구가 아니라 ‘거창’인데 이전에는 없던 길이 하나 생겼으니 물어보아야 하고, 이 언저리에 옛날 나와 인연이 되어 이곳에서 사흘을 묵다가 '감악산'을 넘어 '거창읍'땅에서 삼년이나 있게 되었던 그 전우의 행방을 알아보지 않고는 떠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차에서 둘이 다 내려서 나는 친구의 이름을 대면서 길가의 집을 뒤졌지만 사람이 있는 집은 없었다.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마을이다. 그래도 갈림길 언저리는 몇 집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을, 갠 날 천둥에 망아지 뛰듯 뛰어다니면서 물었다. 아 ! 이게 웬일인가! ‘신 범성’이란 친구가 이 마을에 산단다. 여기 오기 전에 먼젓번 친구에 물어 보았었는데, 그 친구가 말하기를 이 마을에서 구멍가게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기에 용기를 내서 수소문하던 참이었다.

글쎄 이게 웬일인가. 이 마을에 그 것도 여기서 두 집 건너에 있다는 이웃의 얘기가 거짓말 같이 믿어지지 않았지만 곧 확인되었다.

친구는 반겼다. 친구가 말했다. ‘그 때는 어려웠다. 삼 개월씩이나 월급이 없었다.’고.  또 그 부인이 말했다. ‘그 때는 참으로 어렵게 지냈는데, 면소에서 다른 사람이 대신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육 개월 간 무보수로 일했다’고,  묻지도 않았는데도 둘이 연달아 이야기 했다.

그들도 오십 년 동안 마음에 두고 나를 그렸던 것이다. 그렇기에 삼 년간이나 ‘거창’에 있었는데도 연락 한번 없었던 것, 또한 비로써 풀리는 것이다. 나도 그 때는 경황이 없기도 하려니와 부끄러워서 연락을 취하지 못했는 데, 이제 나를 만남으로써 그동안에 마음 아팠음을 점을 간접 토해내는 것 같았다. 그 때 지게를 지는 나를 바라보는 내외의 마음이 오십 년 후인 지금 곧 바로 읽히고 있었다.

친구는 내가 그 곳에서 지게를 지고 산판에서 생나무로 켠 판자를 져 나르면서 돈을 모아  먼 길, 서울이나 고향 사람들이 모여서 살 것 같은 강원도 속초로 가서 생업을 마련하려던 내 계획을 몰랐겠지만 내 적극적 행동에 적이 놀라고 당황했으리라 싶고, 그래서 내외가 무척 상심 하고  미안했던 것 같다.

나를 시골의 초등학교에서 일할 수 있을 것이란 미련을 갖게 하고서 적극 권유했던 그였지만 막상 내가 그 곳에 닿았을 그 때에는 상황이 바뀌어서 뜻대로 되지 않고 그 눈치를 챈 내가 언제나 그랬듯이 과감하게 돌출행동을 했기에 부부는 당황했으리라. 그런 행동은 내 삶의 방식으로 이날까지 이어 오지만 그들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내 행동에 눈물을 머금고 할 말을 잊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내외가 먼저 그때의 이야기를, 그 때의 저들의 어려웠던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털어놓으면서 용서를 빌듯 미안해하는, 순박한 몸짓을 보였다.

나는 나대로 그들에게 안부 한번 전하지 못하고 이날까지 한 쪽에다 단단히 모셔 놓고서 이제나 저제나 하고 오십 년을 지켜온 내 마음을 그대로 나타낼, 좋은 표현 방법이 없어서 그저 많이 변한 시골의 정경 이야기를 뇌까렸을 뿐이다.

나는 지금 거창으로 가야한다. 명령하듯 내뱉는다. '나와 함께 지금 거창으로 나가서 밤을 새워 가면서 지난 날을 이야기하고 싶다'는 심경을 토해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때가 시골의 어느 곳에서나 시제를 지내야하는 날이라서 옛 전우는 마음은 가고 싶지만 내일은 안 된다면서 어쩔 수 없이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자면서 계면쩍어 한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든 명함을 챙기고서 내 전화번호를 남기고 떠나왔다.

강산은 그야 말로 변해 있었다. 내가 이곳에 며칠 머물다 나올 때, 그 몇 해 전에 옛 전우와 함께 이곳에 휴가 왔을 때 다니던 그 ‘감악산’의 산허리가 깎아지른 포장길로 변해 있었으니 세월의 흐름을 실감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 내 생애를 반추하고 있다. 그래서 내 생의 포물선의 시작의 그 길을 돌아가는 것이다. 비록 시간적 차이는 있을지라도 더듬어서 내 과거를 역행해서 내가 갈 곳, 곧 내가 떠난 내 어머니가  있는 고향으로 가는 것이다. 그 길이 마음의 길이던 실체적 공간이던 나는 가리지 않고 꼭 회기의 포물선을 그을 것이다. 그래서 내 삶의 뜻을 되새겨 볼 것이다. 그래서 한 생을 그리움에 젖어 살았던 나날들을 곱게 물들여서 색칠할 것이다.

'거창읍'에 있는 친구를 찾아서 한동안 뜸했던 거리를 좁히고 삶의 향기를 맡으면서 하룻밤을 신세지고 새벽녘에 떠났다. 모두 내 발자국의 깊이가 새겨지는 참이다.

온천탕에서 시골의 인심을, 탕 속의 짙고 억센 사투리로 맞보고 대구로 들어섰다.

아직은 시골티가 물신풍기는 담배연기 자욱한 지하 다방에서 신명나지 않는 그날이 그날 같은 이 일에 지처서 다방은 젊은 아가씨에게 맡기고 자기는 심산유곡을 찾아 약초를 캐서 조약을 만들어서 판다는 주인, 아줌마도 아니고 처녀도 아닌 이즈음 말하는‘미시’의 넉살좋은 짙은 입담을 들으면서 그나마 시골에서 입은 늙은이들의 앞을 밝게 읽도록 나를 추스르게 했다.

육십 년대로 일시에 돌아간 몇 시간이었다. 내 인생의 반려자는 없고 다만 아쉬운 추억만 맴돌다가 사라지는 내 과거에의 여행길이다.

시간에 맞추어서 약속된 장소로 옮겼다. 어떻게 만났는지 대구 친구의 딸들은 함께 모여서 나를 반긴다. 모두 내 과거의 기억을 생생히 일깨우는 딸, 딸들이다.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딸들은 선물과 노자도 마련해 주었다. 하나같이 내가 이승에서 갚다가 못 갚으면 저승에 가서라도 갚아야할, 고마운 격려의 꽃가루다. 내 갈 길에 곱게 뿌려지는 꽃가루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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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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