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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론 노트

죽음에 대해서


    요사이 나는 죽음에 대해서 그렇게 두렵게 상각하지 않게 되었다. 나이 탓이리라. 전에는 그런 죽음의 두려움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 쓰기도 한 나였지만 지금은 다르다. 생각지도 않은 소식인 저승꽃이 점점 많아지는 나이로 달려온 것이다. 요 몇 년 사이에 나는 가까운 집안 어른의 죽음을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맞았다. 그래서 어떤 고통을 받던 병자든지 죽음의 순간에는 평화가 온다는 것을 나는 목격했다. 묘소에 가서도 예전처럼 음참(陰慘)한 기분이 들지 않고 묘지가 평화로운 정원으로 까지 부르게 되는 실감을, 확실하게 밝힐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병치레를 그다지 하지 않는 편이지만 병상에 누워있을 때는 이상한 마음으로 우울해진 적이 있다. 병에 걸리지 않았을 때는 별로 진실한 마음으로 무어인가를 생각하게 되지 않는다는 것은 현대인들이 갖는 하나의 특징이고, 그래서 이것이 또한 현대인들의 또 다른 지극히 특징적인 병의 하나이다.

 

   실제로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은 병의 회복기에서조차 건강을 챙기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것은 청년의 건강(健康)감도(感度)와는 다르다. 회복기의 건강감(健康感)은 자각적(自覺的)이고 불안정(不安定)한 것이다. 건강이란 것은 건장한 젊은 사람처럼 자기가 건강하다는 것을 자각하지 않는 상태라고 한다면 이는 건강이라고 하는 것조차도 (말이)될 수 없는 것이다. 이전에 르네싼스에는 이러한 건강이(란 말이)없었다. 페트라르카  <Petrarca:이탈리아의 시인·인문학자(1304-74) 문예 부흥기 최대의 시인으로 14행시의 확립자. 저서로는 ‘서정 시집’ ‘아프리카’ 등이 있음.> 등이 맛본 것은 병 회복기(恢復期)의 건강인 것이다. 여기에서 생기는 리리시즘 <lyricism:서정미(抒情味)> 이 르네싼스적 인간을 특징 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전(古典)을 부흥(復興)하려고 하던 르내싼스는 고전적이지 못하고 오히려 낭만적(浪漫的)이었다. 새로운 고전주의는 그 시대에서 새로 일어나는 과학의 정신에 의해서만이 가능했다. 르네싼스의 고전주의자는 라파엘이 아니고 레오날드 다빈치였다. 건강이 회복기(恢復期)의 건강으로서 밖에 느껴지지 않는 데에 현대의 근본적인 서정적(抒情的), 낭만적(浪漫的)성격이 있다. 지금 만약 현대사회가 새로운 르네싼스라고 한다면 거기에서 나오는 새로운 고전주의의 정신은 어떤 것일까!

 

   사랑하는 사람이나 친한 사람의 죽음이 많아지면서 죽음의 공포는 반대로 엷어지는 것조차 느낀다. 태어나는 사람보다 죽은 사람에게 한층 가깝게 자기를 느낀다는 것은 나이의 영향일 것이다. 30대는 40대보다 20대를, 더욱이40대에 들어간 사람은 30대보다는 50대를 한층 가까이 느낄 것이다. 40대를 가지고 초로라고 함은 동양의 지혜를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단지 신체의 노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의 노숙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나이가 된 사람에게는 죽음은 위로(慰勞)로조차 느껴지는 것도 가능한 것이다. 죽음의 공포는 언제나 병적으로, 과장하여 일컬어진다. 지금 내 마음을 사로잡아 놓아주지 않는 파스칼에 있어서조차도 그렇다. 진실은 죽음의 평화인데 이 감각은 노숙(老熟)된 정신의 건강(健康)징표(徵表)인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웃으며 죽어간다는 중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건강한 국민이 아닌가하고 생각한다. 퀘테가 정의한 것처럼 낭만주의라는 것은 일체의 병적인 것이고, 고전주의라는 것은 일체의 건강한 것이라고 한다면 죽음의 공포는 낭만적인 것이다. 죽음의 평화는 고전적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중국 사람이 세상의 어느 국민보다도 현실주의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나는 아직 삶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리오.’ 라고 한 공자의 말에도 이런 중국인의 성격을 배경으로 한 실감(實感)이 번져 나오는듯하다. 파스칼은 몬태뉴가 죽음에 대해서 무관심하다면서 비난하였지만 나는 몬테뉴를 읽고 나서는 그에게는 뭔가 동양의 지혜에 가까이 있는 것을 느꼈다. 그는 최상의 죽음은 미리 생각하지 않은 죽음이라고 쓰고 있다. 중국 사람과 불란서 사람과의 유사점은 어찌되었건 주목할 일이다.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죽음은 관념(觀念)이다. 그래서 올바른 관념은 죽음의 입장에서 생겨난다. 삶과 대립(對立)한 사상(思想)도 실은 죽음이란 사상에서 출발되는 것이다. 낳음과 죽음을 첨예(尖銳)하게 대립(對立)시켜 본 유럽의 문화적 지반(地盤)- 여기에는 그리스도교의 깊은 영향이 있다.-위에서 사상(思想)이라는 것이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동양에는 사상이란 것이 없다고 할 것인가! 물론 동양에도 사상이 없지는 않았다. 다만 그 사상이란 것의 의미가 다를 뿐이다. 서양사상에 대해서 동양사상을 주장하려고 할 것 같으면 사상이란 무엇인가? 라는 인식론적(認識論的) 문제로부터 음미(吟味)하면서 풀어야 할 필요가 있다.

 

   내게 죽음의 공포가 어떻게 해서 엷어졌는가! 나와 친한 사람과의 사별(死別)이 점점 많아졌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그들과 재회(再會)할 수 있다면- 이것은 나의 가장 큰 희망이다. - 나의 죽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만약 내가 백만 년 살아진다고 하드래도 나는 이 세상에서 다시 그들과 만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이 프로버빌리티 <probability:공산(公算).개연성(蓋然性)> 는 영(零)이다. 나는 물론 내가 죽고 나서 그들과 만날 수 있다는 확실성(確實性)은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 프로버빌리티 가 영(零:0)이라는 것은 누구나 단언할 수 없을 것이다. 죽은 사람들이 그들 나라에서 돌아온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두 가지의 프로버빌리티를 비교할 때 후자가 전자보다는 크다는 가능성은 존재한다. 만약 내게 어느 쪽에 내기를 걸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면 나는 후자(後者)에 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령 아무도 죽지 않는다고 하면 ‘나만이라도 죽어보리라’고 하며 죽음을 획책(劃策)하는 사람이 나올 것은 틀림이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허영심은 죽음조차도 그 대상으로 삼을 만치 크다. 그런 사람이 허영(虛榮)적인 사람임은 어느 누구라도 곧바로 이해하고 비웃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세상세서는 이에 지지 않을 만치 허영적인 것이 많은 데도 쉬이 마음 쓰지 않는다.

 

    어떤 것에도 집착(執着)할 것 없다고 하는, 허무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여간해서는 죽을 수가 없지 않겠는가! 집착하는 데가 있기 때문에 죽음을 잘라낼 수 없다는 것은 집착할 것이 있기 때문에 죽는다고 할 수 있겠다. 간절하게 집착하는 사람은 죽은 후에도 자기가 돌아갈 곳을 갖고 있다. 그러기에 죽음에 대한 준비란 것은 어디까지나 집착(執着)할 것을 만든다고 할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 것이 나의 영생(永生)을 약속(約束)한다.

 

   죽음의 문제는 전통적(傳統的)인 문제와 이어져 있다. 죽은 사람이 소생(蘇生)하여 살아간다는 것을 믿지 않고서 전통을 믿을 수 있는 것인가! 되살아나 삶을 이어간다는 것은 업적(業績)이지 작자(作者)는 아니라고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피조물이 조물주보다도 위대하다고 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원인은 결과에 적게나마 같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보다 큰 것이 자연의 법치이라고 생각하게된다. 그 사람이 만든 것이 되살아나서 삶을 오래 이어간다면 그 사람자신이 되살아나 삶을 오래 이어가는 힘을 그 이상으로 갖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인가?

 

   만약 우리가 프라톤의 불사보다도 그의 작품의 불변을 바란다고 하면 우리의 마음에 허영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 것의 영생보다도 그것이 이루어 놓은 것이 영속적이기를 바랄 수 있는가?

 

   원인은 적게나마 결과와 대등하다고 하는 것은 자연의 법칙인데 역사에서는 오히려 결과가 언제나 원인보다도 크다고 하는 것을 법칙으로 하는 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역사보다 우월한 원인이 우리 자신이지 않고 우리를 초월한 것의 어떤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우리를 초월한 것은 역사에서 만들어진 것이 되살아나서 살아나간다는 것을 바라고 그것을 만드는데 관여한 원인이었던 것이 되살아나서 이어진다는 것은 결코 바라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만약 우리 자신이 과거의 것을 되살리고 길이 이어지게 한다고 하면 그런 힘을 갖고 있는 우리로하여 만들어진 것보다도 만드는 것을 되살리어서 길이 이어지게 하는 것이 더욱 쉽지 않다는 것을 생각할 수있을 것인가?

 

   나는 지금 인간의 불사(不死)를 입증하려고도 하지 않고, 부정(否定)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죽은 이의 생명을 생각하는 것은 산 사람의 생명을 생각하는 것보다도 논리적으로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죽음은 관념(觀念)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념(觀念)의 힘을 빌려서 인생을 살려고 하는 사람은 죽음의 사상(寫象)을 잡고 출발하는 것이 상례(常例)라는 것이다. 모든 종교가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의 전통적 문제는 죽은 이의 생명에 관한 문제다. 이는 생존하고 있는 사람의 생장(生長)의 문제는 아니다. 통속적(通俗的)인 전통주의(傳統主義)의 오류(誤謬) -이 오류는 셰링 <Schelling;독일의 철학자(1775-1854); 독일 관념론(觀念論) 및 낭만파(浪漫派)의 대표자. 저서에 ‘인간적 자유의 본질’‘자연 철학의 이념’ 등이 있음.> 헤겔등과 같은 독일의 최대 철학자조차도 함께하고 있 - 듯, 모든 것은 과거로부터 점차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함에 따라서 전통주의(傳統主義)를 생각해보려고 했다. 이런 바탕위에서 자연철학(自然哲學)적인 견지(見地)에서는 절대적(絶對的)인 진리(眞理)라고 여기는 전통주의의 의미는 이해되지 못하고 전통의 의미가 스스로 자기 안에서의 성장하려는 속에서만 찾으려고 하는 한 상대적인 것에 불과했다. 절대적인 전통주의는 사는 사람들의 성장이론이 아니고 죽게 되는 사람의 생명이론을 기초로 하고 있다.

 

   과거는 죽음을 끝으로 여긴 나머지 이미 죽음이라고 하는 의미에서 현재에 사는 사람에게서는 절대적인 것이다. 절반은 살고 절반은 죽은 것같이, 보통으로 막연히 표상(表象)되어있는 과거는 살아 있는 현재로서는 절대적인 것이지는 않다. 과거는 무엇보다 우선 죽을 것으로 해서 절대적인 것이다. 이 절대적인 것이 단지 절대적인 죽음인가? 혹은 절대적인 생명인가? 죽는다는 것이 지금 살고 있는 것처럼 생장(生長)하지도 않는다면 노쇠(老衰)할 수도 없다. 여기서 죽은자의 생명이 믿어지려면, 그것은 절대적인 생명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절대적인 생명은 진리(眞理)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바꾸어 말하면 과거는 진리인가? 또는 허무(無)인가? 전통주의는 틀림없이 두가지중 하나를 택하는 우리의 결의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 가운데에 자연적으로 흘러들어서 우리들 생명의 일부분으로 되어있다고 생각하는, 과거를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전통주의는 모든 역사주의(歷史主義)랑은 엄밀히 구별되지 않으면 안 된다. 역사주의(歷史主義)는 진화(進化)주의와 같은 근대주의(近代主義)의 하나인 데 그 스스로 진화주의로 될 수가 있다. 이러한 전통주의는 그리스도교, 특히 그 원죄설(原罪說)을 배경으로 해서 생각하면 용이(容易)하게 이해할 수가 있다. 만야 이러한 원죄의 관념이 없거나 잃어버렸다고 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미 베트라르카 <veto 루가. 그리스인 의사로, 초대 교회 시대의 대표적 저술가. 바울의 협력자. 누가 복음·사도행전의 저자로 전해 옴.> 처럼 르내싼스의 휴머니스트 <humanist; 휴머니스트. 인도주의자.>는 원죄를 원죄로 보지 않고 오히려 병(病)으로써 체험했다. 니체는 물론 지드 < Gide, André ; 프랑스의 작가(1869-1951). 기성관념이나 도덕에 구애되지 않는 성실한 자아(自我)를 그려 1차 대전 후의 청년층에 영향을 줌. 1947년 노벨 문학상 수상. ‘좁은 문’으로 유명.>처럼 지금의 휴머니스트에서 드러내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 의미에서의 병의 체험인 것이다. 병의 체험이 원죄의 체험으로 바뀜으로 해서 근대주의의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이다. 휴머니슴은 죄의 관념이 아니고 병의 관념에서 출발할 수 있는 것인가? 죽음은 관념이고 병은 경험인가? 어찌되었건 병의 관념에서 전통주의를 끌어내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죄의 관념이 있지 않다고 하는 동양사상에서 전통주의라는 것은, 그리고 또한 휴머니즘 이란 것은, 어찌된 것인가? 문제는 죽음을 보는 방식에 달려있는 것이다. 미끼기요시/외통

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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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haussure nike air max 2013.04.08 21: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혼자였을때도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

  2. louis vuitton sale 2013.04.09 23: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계는 절대적으로 공정하고 공평 하나의 요점은 그게 아니 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