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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론 노트

회의(懷疑)에 대해서.


   회의의 의미를 바르게 판단하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어쩌면 회의는 신비(神秘)화되어, 거기서 하나의 종교가 생기기에까지 이르렀을 것이다. 모든 신비를 떨쳐버리는 것이 회의가 할 일이라고 해서, 반대로 다른 경우에는 어떤 회의도 회의라고 하는 이유로 용서 없이 부도덕(不道德)으로 처서 깎아내려진다. 회의(懷疑)는 지성(知性)의 하나인 덕(德)으로 되어있음에도 앞서의 경우 회의 그 자체가 하나의 독단(獨斷)처럼 되어있다. 뒤의 경우 회의를 머리부터 두들겨 패려고 하는 것 또한 독단이다.

 

   어는 것이거나 확실한 것은 회의가 유독 인간적이란 것이다. 신(神)은 회의 가 없는 것이다. 또 짐승도 회의는 없는 것이다. 회의는 천사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사람만이 갖는 것이다. 사람이 지성(知性)으로 해서 동물보다 뛰어나다고 하려면 회의에 의해서 특색지어지게 될 것이다. 실제로 적어도 회의적이지 않은 지성인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독단적인 사람은 어떤 때는 천사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짐승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인간적 지성의 자유는 목하(目下) 회의(懷疑) 안에 있다. 자유인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치고 회의적이지 않은 사람을 나는 보지 못했다. 이렇게 참다운 인간이란 모두 회의적인 면이 있고, 그럼으로써 자유인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철학자가 자유의 개념을 어떻게 규정 짖는다 하드래도 현실에서의 인간적 자유는 이 틀 안에 있다. 고전적인 휴머니즘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시한 덕(德)이었던 이 절도(節度)란 것은 현대적 사상에서는 드물게 나타난다. 회의가 지성의 덕이 되기 위해서는 절도가 없어서는 안 된다. 일반적으로 사상가의 절도라고 하는 것이 문제다. 몽테뉴<Montaigne, Michel de;프랑스의 수필가·모랄리스트(1533-92). 한때 관리가 되었으나 1571년 퇴직함. 대표작 ‘수상록’은 인간 존중을 바탕으로 한 관용 정신을 설파하여 모럴리스트 연구서가 됨>의 최대(最大)의 지혜(智慧)는 회의(懷疑)에 있어서 절도(節度)가 있다고 하는데 있었다. 또 실로 절도를 모르는 회의는 참된 회의가 아닐 것이다. 도(度)를 넘은 회의(懷疑)는 순수한 회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이 철학 설로 한 회의론으로 되어 있는지 이것 또한 함께 회의의 신비화, 내지는 종교화로 빠져들고 있다. 그 어느 것이라도 벌써 회의는 아니고 하나의 독단(獨斷)이다.

 

   회의는 지성의 덕(德)으로써 인간정신을 정화(淨化)한다. 마치 우는 것이 생리적으로 우리의 감정을 정화하는 것처럼 회의도 우리를 정화한다. 하지만 회의 그 자체는 우는 쪽이 아니라 웃는 쪽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웃음이 짐승에게는 없는, 인간적인 표정(表情)이라고 한다면 회의와 웃음과의 사이에 유사점(類似點)이 있음은 자연스럽다. 웃음을 우리들의 감정을 정화할 수 있다. 회의적인 사람의 표정은 일그러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성 그 나름의 고유한 쾌활함을 갖지 못하는 회의는 진정한 회의가 아닐 것이다.

 

   참된 회의(懷疑)가는 소크라테스였다. 소크라테스는 회의가 무한의 탐구에 다름 아닌 것을 드러냈다. 그는 또 참 비극적(悲劇的)인 사람은 참 희극적(喜劇的)이라는 것을 드러냈다.

 

   종래의 철학에서 영속적(永續的)인 생명을 얻기 위한 무엇이건 간에 회의적인 것을 포함하지 않은 것이 있었는가? 단 하나의 예외가 있다면 헤겔일 것이다. 헤겔의 철학은 역사가 증명하듯이 한 때에 열광적인 신봉자를 만들었지만, 이윽고 전혀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특질을 담고 있었다. 이 사실 속에 두려운 헤겔철학의 비밀이 있는 것이다.

 

   논리학(論理學)자의 이론적 밑바탕에는 직관(直觀)이 있다고 한다. 사람은 무한(無限)이 증명해 나갈 수가 없이, 모든 논증은 어느새 그 스스로는 논증이 되지 못하는, 직관적(直觀的)으로 확실한 것을 전제로 해서 거기서부터 출발해서 추론(推論)한다고 할 수 있다. 허나 논리의 밑바탕에 있는 직관적인 것이 언제나 확실한 것이라고 하는 증명은 존재하는 것일까? 만약 그것이 언제나 확실하다고 하면 어째서 사람은 그 직관에 머무르지 않고 더욱 논리를 필요로 하는 것일까? 확실한 직관이 있는 것만이 아니고 불확실한 것의 직관이 있는 것처럼 생각 된다. 직관을 언제나 의심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지만 직관을 언제나 믿는 것도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보통 말하기는 거꾸로, 감성적(感性的)인 직관(直觀)이 그 스스로의 종류에서 확실한 직관인 것에 대해서, 지성적(知性的)인 직관(直觀)의 특징(特徵)은 오히려 불확실(不確實)한 것의 직관에 있는 것처럼도 생각하게 된다. 확실한 직관은 -감성적인 것으로 치든 초감성적(超感性的)인 것으로 치든 -그 자체(自體)로서는 논리의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반면, 불확실한 것의 직관-회의적(懷疑的)직관(直觀) 혹은 직관적(直觀的)회의(懷疑)-야말로 논리(論理)를 필요로 하며 논리(論理)를 끌어내게 한다. 논리(論理)에 의해서 회의(懷疑)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회의(懷疑)로부터 논리(論理)가 구(求)하여지는 것이다. 이렇게 논리(論理)를 구(求)하는 것에 지성(知性)의 긍지(矜持)가 있고 자기(自己)존중(尊重)이 있는 것이다. 모든 논리가(論理家)든 공식주의(公式主義)자고 독단(獨斷)가로서의 하나의 부류에 불과한 것이다.

 

   불확실(不確實)한 것이 확실(確實)한 것의 기초(基礎)다. 철학자는 자기에게 회의(懷疑)가 있는 한 철학을 할 것이며 사물(事物)에 대해 쓸 것이다. 그는 불확실(不確實)한 것 때문에 이전보가 더 일에 열중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사람은 불확실한 것을 위해서 일을 한다.’고 파스칼은 말하고 있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사람은 불확실한 것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확실 것에서 일하는 것이다. 인생은 단순히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을 만드는 데 있는 것이다.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형성(形成)작용이다. 또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는 이유(理由)이다. 그래서 사람은 불확실(不確實)한 것에서 일한다고 하는 것에서 온갖 형성(形成)작용의 밑바탕에는 내기(賭博)의 본성이 깔려있다고 할 수 있다.

 

   독단(獨斷)에 대한 회의(懷疑)의가 갖는 힘(力)과 무력(無力)이란, 감정에서생기는 사념(思念)에 대한 지성(知性)의 힘과 무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하나의 도박(賭博)이라고 할지라도 지성적(知性的)인 것이다. 감정에서 생기는 사념은 언제나 그저 긍정적(肯定的)이므로 독단(獨斷)의 거의는 감정에서 생기는 사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많은 회의(懷疑)가들은 겉으로 나타날 정도의 회의(懷疑)가는 아니다. 또 많은 독단(獨斷)가는 겉으로 나타날 정도의 독단(獨斷)가가 아니다.

 

   사람은 때때로 다른 것에 대한 허영(虛榮)에서 회의적(懷疑的)으로 되지만 다시 보다 많은 다른 것에 대한 허영(虛榮)을 위해서 독단적(獨斷的)으로 된다. 그래서 한편 인간 상호간에 정치적 욕망, 즉 다른 것에 대한 지배(支配)의 욕망(慾望)이 보편적(普遍的)인 것처럼 드러냄과 동시에 그에게서 또 교육적(敎育的) 욕망(慾望)이 보편적(普遍的)임을 알게 한다. 정치에서는 독단도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교육에 있어서도 같이 독단이 필요한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다. 단지 정치적 욕망을 포함하지 않은 교육적 욕망이 덜한 것은 확실하다.

 

   어떠한 사람도 다른 것을 믿게 할 정도가 될 만치 자기 자신을 믿게 할 수는 없다. 다른 이를 믿음으로 이끄는 종교가는 반드시 절대적(絶對的) 회의(懷疑)가 없는 인간이지는 않다. 그가 다른 이를 꿰뚫는 힘은 오히려 그 절반가량은 그 사람의 안에 살아있는 회의(懷疑)에 의존하고 있다. 적어도 그렇지 않은 종교가는 사상가(思想家)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스스로는 의심하면서 발표한 의견이 다른 사람에 의해서 자기는 의심 없이 믿는 것처럼 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곧 자기도 그 의견을 믿게 되는 것이다. 신앙의 근원(根源)은 다른 사람에게 있다. 그것은 종교에서도 그런데 종교가는 자기신앙의 근원(根源)은 신(神)에게 있다고 한다.

 

   회의(懷疑)라는 것은 산문(散文)으로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회의(懷疑)의 성질(性質)을 나타냄과 함께, 거꾸로 산문(散文)의 고유(固有)한 재미나 또는 그 어려움이 어디에 있는가를 나타내고 있다.

 

   참된 회의(懷疑)가는 논리(論理)를 추구 한다. 하지만 독단(獨斷)가는 전혀 논증(論證)하지 않고 그저 형식적(形式的)인 논증(論證)을 할뿐이다. 독단가는 이따금 심한 패배주의(敗北主義)자, 곧 지성의 패배주의자가 된다. 그들은 겉으로 드러나도록 강하지는 않고. 그들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강해져야 되겠다고 느낄 정도로 약하다.

 

   사람은 패배주의에서 독단가가 된다. 또 사람들은 절망(絶望)에서 독단(獨斷)가가 된다. 절망(絶望)과 회의(懷疑)는 같지 않다. 단지 지성(知性)이 보태질 때만이 절망(絶望)이 회의(懷疑)로 바뀌어 지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순수(純粹)한 회의(懷疑)에 머물기는 어렵다. 사람은 회의(懷疑)하기 시작하자마자 감정에서 생기는 사념(思念)이 그를 잡아두기 위해서 기다리기 때문에 진정한 회의는 젊은이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개는 정신의 성숙함을 나타내는 때인 것이다. 젊은이의 회의(懷疑)는 끊임없는 감상(感傷)이 동반(同伴)함으로 감상(感傷)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회의(懷疑)에는 절도(節度)가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절도(絶倒)가 있는 회의(懷疑)만이 진정한 회의라는 이름의 제값을 한다고 하는 것, 그것이 회의(懷疑)가 한 방법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회의(懷疑)가 방법(方法)이라는 것은 데카르트<(Descartes, René.)프랑스의 철학자·수학자·자연학자(1596-1650). 근대 합리주의 철학의 시조(始祖). 회의(懷疑)하는 정신을 내세워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는 유명한 명제에 도달하였음.)>에 의해 확인된 진리다. 데카르트의 회의는 일견,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극단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언제나 주의 깊고 절도를 지키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도 그는 휴머니스트였다. 그가 방법(方法)서설(敍說)제3부에서 도덕(道德)론을 잠정적(暫定的)인, 혹은 일시적(一時的)인 것이라고 일렀던 것은 지극히 특징적이다.

 

   방법에 있어서의 숙달(熟達)은 교양(敎養)에 있어서 보다도 중요한 것이지만 회의(懷疑)에서의 절도(節度)가 있다고 하는 것보다도 결정적인 교양의 드러냄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는 벌써 회의(懷疑)하는 힘을 잃은 교양인(敎養人), 혹은 한 번 회의적(懷疑的)으로 되었다가 어느새 어떤 방법적(方法的)으로 생각할지 몰라 하는 교양인이 많다. 어느 것이던 딜레탄티즘<dilettantism도락. 학문·예술을 취미로 애호함.>에 빠져드는 교양의 예술가<芸術家 (프랑스어)décadence데카당스>인 것이다.

 

   회의(懷疑)가 방법(方法)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비로써 독단(獨斷)도 또한 방법(方法)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앞서의 것을 우선하여 이해 못하고 뒤의 것만을 주장(主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직 방법이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회의(懷疑)가 한 곳에 머문다는 것은 틀린 것이다. 정신의 습관성(習慣性)을 부수는 것이 회의(懷疑)이다. 정신이 습관적으로 된다고 하는 것은 정신 안에 자연의 힘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회의는 정신의 자동조절장치를 부수어버림으로써 이미 자연에 대한 지성의 승리를 나타내는 것이다. 불확실(不確實)한 것이 근원(根源)이고 확실(確實)한 것은 목적(目的)이다. 확실한 모든 것은 이미 형성(形成)되어 있는 것, 결과(結果)이지만 애초의 원리(原理)는 불확실(不確實)한 것이다. 회의(懷疑)는 근원(根源)으로 관계(關係)지어져있고 독단(獨斷)은 목적(目的)에 관계(關係)지어져있는 것이다. 이론가(理論家)는 회의적(懷疑的)인가 하면 실천가(實踐家)는 독단적(獨斷的)이다. 또 동기론(動機論)자가 회의(懷疑)가 인가하면 결과론(結果論)자는 독단(獨斷)가라고 하는 것이 일상(日常)인 것은 여기에 기인(基因)하는 것이다. 그러나 독단(獨斷)이나 회의(懷疑)나 다 같이 방법(方法) 일수밖에 없는 것을 이해(理解)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긍정(肯定)이 부정(否定)에 있는 것처럼, 물질(物質)이 정신(精神)에 있는 것처럼 독단(獨斷)은 회의(懷疑)에 있는 것이다.

 

   모든 회의(懷疑)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확실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생은 형성(形成)작용(作用)이기 때문에, 단순(單純)히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創造)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끼기요시/외통



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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