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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론 노트

습관(習慣)에 대해서


   인생이 어떤 의미에서는 습관이 전부다, 라고 하는 것은 결국 모든 생명은 틀을 갖고 있다고 함과 같다. 생명이란 틀을 갖고 있다고 말 할 수가 있으므로 해서 생명의 습관은 그 습관에 의해서 행위의 틀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습관은 단지 공간저인 틀은 아니다. 단순히 공간적인 클은 죽은 것이다. 습관은 그에 반해서 살아있는 것이다. 그래서 단순히 공간적(空間的)이지 않고 공간적이면서도 시간적(時間的)이다. 시간적이면서도 공간적인 것, 즉 변증법적인 틀인 것이다. 시간적으로 움직이는 것인 동시에 공간적으로 머물러 있다고 하는 데에 생명적인 틀이 되는 것이다. 습관은 기계적이지 않고 어디까지나 생명적인 것이다. 그것은 틀을 만드는 생명의 내적(內的)이고 본질적(本質的)인 작용에 속해있는 것이다.

 

   보통 습관은 같은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나타난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인간의 행위에서는 모두 동일한 것은 없을 것이다. 각각의 행위에는 언제나 우연적인 데가 있다. 우리들의 행위는 우연적이면서도 자유스러운 관계로 해서 습관으로도 되는 것이다. 습관은 같은 것을 반복하는 물리적 결과는 아니다. 확정적(確定的)인 것은 불확정적(不確定的)인 것에서 나온다. 개개(箇箇)의 행위가 우연적(偶然的)이기 때문에 습관도 되는 것인데 습관은 많은 우연적인 행위, 말하자면 통계적(統計的)인 규칙(規則)성인 것이다. 자연의 법칙도 통계적인 성질의 것인 한 습관은 자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습관이 자연이라고 생각되는 것처럼 자연도 습관인 것이다. 다만 습관이라고 할 때 자연은 구체적인 틀로서 드러나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

 

   모방(模倣)과 습관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상반(相反)되는 것이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는 같은 것이다. 모방은 특히 외부의 것, 곧 새로운 것을 모방 하면서 유행의 원인이 된다고 한다. 유행에 대해서 습관은 전통적인 것이고 습관을 없애버리는 것은 유행인 것이다. 유행보다 쉽게 습관을 무너뜨리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습관도 그 스스로 하나의 모방인데, 그 내부(內部)의 것, 낡은 것의 모방인 것이다. 습관은 자기 스스로를 모방한다. 자기가 스스로를 모방하는 데서 습관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유행이 옆으로의 모방이라면 습관은 내리모방인 것이다. 어쨌든 습관도 늘 모방되는 이상 습관에서도 우리들은 하나의 행위와 다른 행위에 대해서 외부(外部)에 있는 것과 같이 독립되지 않으면 안 된다. 습관을 단지 연속(連續)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비연속적인 것이 동시에 연속적인 것이다. 연속적인 것이 동시에 비연속적인 데에서 습관이 생기는 것이다. 즉 습관은 생명의 법칙을 표현(表現)해 내는 것이다.

 

   습관과 같이 유행도 생명으로서의 하나의 형식이다. 생명은 형성작용(形成作用)인데 모방은 형성 작용에서의 하나의 근본적인 방법인 것이다. 생명이 형성 작용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교육(敎育)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교육에 대한 모방의 의의(意義)에 관해서는 예로부터 자주 말하고 있다. 여기에, 습관이 하나의 모방이란 것을 생각함과 함께 유행이 또한 모방으로서 어느 만치 큰 교육적 가치를 갖고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다.

 

   유행이 환경(環境)에서 규정되는 것처럼 습관도 환경에서 규정되는 것이다. 습관은 주체(主體)인 환경(環境)에 대한 작업(作業)적 적응(適應)으로 인하여 생긴다. 단지 유행에서의 주체는 환경에 대해서, 보다 많이 수동적(受動的)인 것에 반(反)해서 습관에서는 보다 많이 능동적(能動的)인 것이다. 습관의 이런 힘은 형태(形態)의 힘인 것이다. 하지만 유행이 습관을 허문다는 것은 그 습관의 틀이 주체와 환경과의 관계에서 생긴다는 변증법적(辨證法的)인 것이 되기 위해서다. 유행의 이런 힘은 그것이 습관과 상반되는 방향의 것으로서 된다고 하는 데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유행은 최대의 적응력(適應力)을 갖는다는 인간에게 특징적(特徵的)인 것이다. 습관이 자연적(自然的)인 것인가 하면 유행은 지성적(知性的)인 것이라고 조차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습관은 자기에 의한 자기의 모방으로서 자기의 자기에 대한 적응(適應)임과 동시에 자기의 환경에 대한 적응(適應)인 것이다. 유행은 환경의 모방으로서 자기의 환경에 대해서 적응하는데서 생기긴 하지만 유행에도 자기가 자기를 모방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유행을 따르는 것은 무언가 자기에 아부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단, 유행이 틀이라는 것에서는 불안정(不安定)하고, 유행에는 틀이 없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습관은 틀로서는 안정(安定)되어 있다. 헌데도 습관이 틀(形)로서 안정돼 있다고 하는 것은 습관이 기술(技術)이란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틀은 기술적으로 되는 것이다. 허지만 유행에는 이런 기술적인 능동성(能動性)이 빠져있다.

 

   하나의 감정(感情)에 의한 사념(思念) 을 지배하는 것은 이성(理性)이 아니고 다른 감정에 의한 사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르게 말한다면 습관이야 말로 감정에 의한 사념(思念)을 지배(支配)하는 것이다. 하나의 감정에 의한 사념(思念)을 지배하는 데는 이성(理性)이 아니고 다른 감정에 의한 사념이라고 한다면 그 감정에 의한 사념의 힘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단지 감정에 의한 사념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정에 의한 사념이 습관으로 되어 있는 데 있다. 내가 두려운 것은 그의 미움이 아니고 나에 대한 그의 미움이 습관화 됐다고 하는 것이다. 습관이 마들어지지 않고는 감정에 의한 사념(思念)도 힘이 없다. 하나의 습관은 다른 습관을 만들므로 해서 무너진다. 습관을 지배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고 다른 습관이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의 틀을 정말 극복하는 것은 다른 틀인 것이다. 유행도 습관이 되기까지는 불안정한 힘에 지나지 못한다. 감정에 의한 사념(思念)은 그 스스로 틀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습관에 대한 감정에 의한 사념(思念)의 무력함도 거기에 기인한다. 하나의 감정에 의한 사념(思念)이 다른 감정에 의한 사념(思念)을 지배하는 것도 지성이 더해지므로 해서 마들어지는, 그런 질서의 힘의 바탕인 것이다. 감정에 의한 사념(思念) 이 틀을 만든다고 하는 것에서는 자연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감정에 의한 사념에 대한 틀의 지배는 자연에 대한 정신의 지배라고 할 수 있다. 습관도 틀로는 그냥 자연이 아니고 이미 정신(精神)인 것이다.

 

   틀을 그냥 공간적인 틀이라고 하여 물질적인 형상으로밖에 나타내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근대의 기계적인 오성(悟性;사물을 판단하는 힘)인 것이다. 오히려 정신이야말로 틀인 것이다. 그리스 고전적 철학은 물질은 무한정인 재료지만 정신은 형상(形相)이라고 생각했다. 현대의 생명철학은 거꾸로 정신적 생명 자체를 무한정 유동(流動)한다고 행각하고 있다. 이 점에서 생명철학도 틀에 관해서 근대의 기계적인 생각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지만 정신을 형상(形相)이라고 생각한 그리스 철학은 형상을 더욱 공간적으로 표상(表象)하였다. 동양의 전통적 문화는 습관의 문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습관이 자연인 것처럼 동양문화의 근저(根柢)에 있는 것은 그런 자연인 것이다. 또 습관이 단지 자연인 것이 아니라 문화인 것처럼 동양적 자연은 동시에 문화의 의미도 갖고 있다. 문화주의적인 서양에서는 틀(形)이 공간적(空間的)으로 표상(表象)되었던데 비하여 자연주의적(自然主義的)인 동양의 문화는 되레 정신으로서의 참 정신적인 틀을 추구(追究)했다. 하지만 이미 틀이라고 하는 이상 그것이 순수한 정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습관이 자연으로 보이는 것처럼 정신적 틀(形)이라고 하드래도 함께 자연의 의미가 없어서는 안 된다. 습관은 단순한 정신도 단순한 신체도 아닌 구체적인 생명의 내적인 법칙이다. 습관은 순수하게 정신적이라고 할 수 있는 활동 속에서도 드러나는 자연적인 것이다.

 

   사유(思惟)의 범주(範疇)를 흠이<Hume, David:영국의 철학자·역사가·정치 및 경제 사상가(1711-76). 철학·문학에 대한 강렬한 욕구로 프랑스에 건너가 첫 저술인 ‘인성론’을 집필. 이밖에 ‘인간 오성’등의 저서가 있음.>습관(習慣)에서 설명하는 것은 현대 인식론(認識論)이 비평(批評)하는 것처럼 그렇게 웃어넘길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나는 모른다. 범주(範疇)의 단순한 이론적 의미가 아니고 그 존재론적(存在論的)인 의미를 생각하려고 할 때는 그것을 습관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더 적절하게 설명할 수가 있을 것인가? 잘 모르겠다. 단지 이제 습관을 단순히 경험에서 생기는 것처럼 생각하는 기계적인 관점에서 보는 것을 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경험론(經驗論)은 기계론(機械論)이라고 하는 데에서 잘못 되어있다. 경험의 반복이란 것은 습관의 본질을 설명하기는 언제나 불충분하다. 예를 들어, 돌을 백만 번 같은 방향과 같은 속도로 던졌다고 하드래도 그것으로 습관이 되지는 않는다. 습관은 생명의 내적(內的)인 경향(傾向)에 속(屬)해있다. 경험론(經驗論)에 반대되는 선험론(先驗論)은 보통, 경험을 습관의 영향이 전혀 없는 감각(感覺)과 동일시(同一視)하고 있다. 감각을 불러내는 작용 중에 나타나는 습관에 영향 받지 않는 지식의“내용”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습관은 사유(思惟) 안에서도 작용하는 것이다.

 

   사회적 습관으로서의 습관이 도덕인데, 권위를 갖고 있다는 것은 그저 그것이 사회적인 것이라고만 하는데 의존하지 않고, 도리어 그것이 표현적인 것으로 하여 틀(形)이란 것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틀(形)도 언제나 초월적(超越的)인 의미를 갖고 있다. 틀(形)을 만든다고 하는 생명의 본질적(本質的)인 작용(作用)이 생명에 내재(內在)하는 초월적(超越的) 경향(傾向)을 드러내고 있다. 그렇지만 틀을 만든다는 것은 동시(同時)에 생명이 자기를 부정(否定)하는 것이다. 생명은 틀(形)에 의해서 살고 틀에 의해서 죽는다. 생명은 습관에 이해서 살고 습관에 의해서 죽는다. 죽음은 습관(習慣)의 극한(極限)인 것이다.

 

   습관을 자유로이 하는 사람은 인생에서 많은 것을 해낸다. 습관은 기술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자유로이 할 수가 있다. 원래에 대체적인 습관은 무의식적(無意識的)인 기술(技術)이지만 그것을 의식적(意識的)으로 기술적으로 자유롭게 하는 것이 도덕(道德)이다. 수양(修養)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기술(技術)인 것이다. 만약 습관이 단지 자연(自然)이 되려면 습관(習慣)을 도덕(道德)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도덕(道德)에는 기술적(技術的)인 것이 있다고 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습관은 우리에게 무엇보다 가까이 있으면서 우리의 힘에서 울어나는 수단(手段)인 것이다.

 

   습관이 기술인 것처럼 모든 기술은 습관적으로 됨에 따라서 진정한 기술로 되는 것이다. 어떤 천재(天才)도 습관(習慣)에 의하지 않으면 어떤 일도 성취(成就)할 수 없는 것이다.

 

   종래(從來)에 수양(修養)이라고 일컫는 것은 도구(道具)시대(時代)사회에서의 도덕적(道德的)형성(形成)의 방법이었다. 이 시대의 사회는 유기적(有機的)이고 한정(限定)되어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엔 도구시대에서 기계시대로 변했고 우리의 생활환경도 전혀 달라져있는 것이다. 이렇게 변하는 과정에서 도덕에서도 수양이란 것으로만은 불충분하게 되었다. 도구의 기술에 비해서 기계의 기술은 습관에 의존하는 것이 적어지고 지식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 많은 것처럼, 오늘날의 도덕에서도 지식이 특히 중요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또 도덕은 유기적인 신체를 떠나는 것이 아니고, 지성 안에도 습관이 활동한다는 것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데카당스 (프décadence 퇴폐-파 [] )는 감정(感情)에 의한 사념(思念)의 부정(不定)을 심히 넘쳐 다룬 것은 아니다. 데카당스는 감정에 의한 사념의 특수한 습관이었다. 인간의 행위가 기술적이라고 하는 데에 데카당스의 근원(根源)이 있다. 감정에 의한 사념(思念)이 습관적(習慣的)으로 되고 기술적(技術的)으로 되는 데서 데카당스가 살아난다. 자연적인 감정에 의한 사념의 폭발은 오히려 습관을 허무는 것이고 데카당스랑은 반대의 것이다. 모든 습관에는 어떤 데카당스의 냄새가 풍기지 않는가? 습관에 의해서 우리가 죽는다고 하는 것은 습관이 데카당스로 되기 위한 것이지 습관이 정지(靜止)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습관에 의해서 우리는 자유로워지면서 습관에 의해서 우리들은 속박(束縛)된다. 하지만 습관이란 것을 두렵게 생각할 것은 우리를 속박(束縛)해서라기보다는 습관(習慣) 속에 데카당스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저 모랄리스트<프moraliste도덕가(道德家)>들은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기괴(奇怪)한 습관이 존재하느냐고 늘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말은 어떻게 습관이 데카당스에 빠져들기 쉬운가를 알려주는 것이다. 많은 기괴(奇怪)한 예술(藝術)이 있는 것처럼 많은 기괴(奇怪)한 습관(習慣)도 또한 존재(存在)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것은 또 습관(習慣)이 예술(藝術)과 같이 구상력(構想力)에 속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습관(習慣)에 대한 유행(流行)은 보다 지성적(知性的)이라고 할 수가 있다. 유행에는 같은 데카당스가 없는 것이다. 거기에 유행의 생명적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행이란 그것이 데카당스로 될 때는 보다 두려운 것이 된다. 유행(流行)은 불안정(不安定)하여 그것을 부축해 줄 틀(形)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으로 해서 유행은 직접적으로 허무(虛無)에 미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 데카당스에는 밑바닥이 없다.미끼기요시/외통

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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