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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론 노트

허영(虛榮)에 대해서


   “피조물이 제구실을 못하게 된 것은 제 본의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희망이 있습니다.”(로마서8장20절)

 

   허영은 인간적(人間的)자연(自然)에서는 보다 보편적(普遍的)이고 보다 고유(固有)한 성질(性質)이다. 허영은 인간존재 그 자체인 것이다. 인간은 허영에 의해서 살고 있는 것이다. 허영은 모든 인간적인 것 중에서 보다 인간적인 것이다.

 

   허영으로 사는 인간생활은 실체(實體)가 없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생활은 픽셔널한<fictional허구적(虛構的)>것이다. 그것은 예술적 의미에서도 그렇다고 하는데, 결국 인생은 픽션(소설:小說)인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라도 하나만의 소설은 쓸 수 있는 것이다. 보통사람과 예술가와의 차이는 단지 하나밖에 소설을 쓸 수 없는 지, 혹은 여러 가지 소설을 쓸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고 할 것이다.

 

   인생이 픽션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실재성(實在性)이 없어서가 아니라 단지 그 실재성이 물적(物的)실재성(實在性)과 같지 않고 오히려 소설의 실재성과 거의 같은 것이다. 즉 실체(實體)가 없는 것이 어찌하여 실재적(實在的)일 수 있느냐는 것이 인생에서 또는 소설에서 같으니, 이것이 근본문제로 되는 것이다.

 

   인생은 픽셔널한 것으로 해서 원래부터 그냥 가능성(可能性)이 있는 것이다. 이 현실성은 우리 생활 속에서 처음으로 증명(證明)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작가가 신(神)이나 동물에 대해서 픽션을 쓰려고 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신이나 동물은 인간의 횃션이 그들 속에 옮겨든다고 할 때만이 픽션의 대상으로 되는 것이다. 한 인간의 생활만이 픽션널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소설적동물이라고 정의되는 것이리라.

 

   자연이 예술을 모방한다고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다. 허지만 예술을 모방하는 것은 고유한 의미에서는 자연속의 인간일 뿐인 것이다. 인간이 소설을 모방하고 또 모방하는 것은 인간이 본성상 소설적이지 않고서는 안 된다. 인간은 인간적으로 되자마자 자기와 자기의 생활을 소설화하기 시작한다.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횃션은 허영심<(虛榮心)vanity>에서 나온다. 인간의 모든 횃션은 인간적이지만, 가령 인간에게 동물적인 횃션이 있다고 하드래도 그것이 바로 허영심(虛榮心)에 붙잡히는데서 인간적인 것이 증명된다.

 

   허영심은, 말하자면 그의 실체에 쫓아서 생각한다면 허무(虛無)인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허영이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그 현상(現象)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적인 모든 횃션은 허무에서 생겨나며 그 현상(現象)에서는 허영적인 것이다. 인생의 실재성을 증명하려는 사람은 허무(虛無)의 실재성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는 인간적 창조는 이렇게 해서 허무의 실재성을 증명하기 위한 것으로 되는 것이다.

 

   ‘허영을 자기 안에 넘치도록 가두고서 그것에 혹사(酷使)당하지 않도록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이 좋다. 말하자면 매일 (물을)퍼낼 필요가 있다’ 고 말한 쥬벨은 상식(常識)가였다. 그러나 이 상식에는 현명한 처세법이 드러나 있는 것이다. 허영에 의해서 멸망하지 않기 위해서 인간은 그 하루하루의 생활에서, 모든 자잘한 일에서, 허영(虛榮)적일 필요가 있다.

 

   이점에 있어서 영웅은 예외이다. 영웅은 그 최후에 의해서, 끝내 멸망에 의해서 자기를 증명하는 것이다. 희극(喜劇)의 주인공(主人公)에는 영웅(英雄)이 없다. 영웅은 다만 비극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허영에 의해서 산다고 하는 것이야 말로 그의 생활에서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인생의 지혜(智慧)는 모두 허무(虛無)에 도달(到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폐(紙幣)는 픽셔널한 것이다. 따라서 또 금화(金貨)도 피션널한 것이다. 하지만 지폐와 금화와는 차별이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불환지폐(不換紙幣)라고 하는 것도 있는데, 모든 게 허영인 인생에서는 지혜(智慧)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곧 금화(金貨)나 지폐(紙幣)를 특히 불환지폐(不換紙幣)랑을 구별하는 판단력(判斷力)인 것이다. 그렇다고 하지만 금화(金貨)도 그 자체가 픽션널 한 것은 아니다.

 

   헌데 인간이 허영(虛榮)적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인간의 보다 높은 성질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허영심이란 것은 자기가 갖고 있는 것 이상인 것으로 나타내려고 하는 인간적인 픽션이다. 이것은 가장(假裝)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허지만 일생을 가장(假裝)으로 지낸 사람이었다고 치더라도 그 사람의 본성(本性)과 가성(假性)을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도덕(道德)도 마찬가지로 픽션이지 않은가! 그 것은 불환지폐(不換紙幣)에 대한 금화정도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인간이 허영(虛榮)적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사회적이라는 것을 말한다. 결국 사회도 픽션위에서 성립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에서는 신용(信用)이 전부이다. 모든 픽션이 허영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픽션에 의해서 생활하는 인간이 허영(虛榮)적이 되는 것이다.

 

   문명의 진보라는 것은 인간생활이 보다 많은 픽션위에 지어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문명의 진보와 함께 허영(虛榮)도 일상다반사(日常茶飯事)로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영웅적(英雄的)인 비극(悲劇) 또한 적어지는 것이다.

 

   픽션인 것을 자연적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은 습관(習慣)이 힘인 것이다. 오히려 습관적으로 되므로 해서 픽션은 비로써 픽션의 의미를 갖는데 이르는 것이다. 그래서 단순히 허영인 것은 아직 픽션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픽션이 허영이라고 하드래도 이미 픽션으로써 타당(妥當)한 이상 단순한 허영에서 보다 높은 인간적인 것으로 되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습관(習慣)은 이미 보다 높은 인간성을 드러내고 있다. 습관은 단지 자연적인 것이 아니고 이미 하나의 지성적 틀이 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의 악은 그가 고독하게 있지 못하는데서 생기는 것이다. 어떻게 하여 허영을 없앨 수 있을 것인가! 허무로 돌아갈 것에서. 혹은 허무의 실재성(實在性)을 증명함에 있어서. 달리 말하면 창조(創造)에 의해서. 창조적인 생활만이 허영을 모를 것이다. 창조라는 것은 픽션을 만드는 데 있으니 픽션의 실재성(實在性)을 증명하게 하는 것이다.

 

 

   허영은 보다 많은 경우에 소비로 이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마음 쓰지 않게 하기 위해서나 혹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 기분 좋게 하기 위하서 허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쥬벨이 말한 것처럼 이미 “반동가리 덕”인 것이다. 모든 허영은 이런 절반의 덕을 쌓기 위해서 허용(許容)된 것이다. 허영(虛榮)을 물리리친다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허영이 될 뿐만 아니라, 선한 마음의 적(敵)인 오만(傲慢)에 자주떨어질수가있는것이다.

 

   저 이상적(理想的)인 나라에서 예술가를 추방하려든 플라톤에는 한 가지 지혜가 있었다. 그렇지만 자기생활에서는 진정한 예술가라는 것이 인간의 입장에서서 허영을 몰아내기위한 최고(最高)의 것이었다.

 

   허영(虛榮)은 생활(生活)에서 창조(創造)와 구별(區別)되어지는 도락<(道樂)딜레탄티즘dilettantism학문·예술을 취미로 애호함>이다. 허영(虛榮)을 예술(藝術)에 의한 도락(道樂)에 비(比)해 생각하는 사람은 허영(虛榮)의 적절(適切)한 처리(處理)법을 발견(發見)해 낼 것이다. 미끼기요시/외통

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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