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

외통프리즘 2022. 1. 8.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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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

9325.220108 삶과 죽음

태중(胎中) 생명이 때가 돼 세상에 나와서 숨 쉬고 움직이고 생각하며 산다. 이 사람이 숨길이 끊어지면 죽었다고 여긴다. 이때까지 사람으로 있게 한 어떤 힘으로 목숨을 이었던 그 힘도 숨끊어지면 사람을 떠나 사라지고 몸은 흙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보면 죽기 전까지 있었던 그 어떤 힘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므로 그 사람이 죽었다고 볼 수 있다. 뒤집어 생각하면 그 힘은 흙이 아니니 죽지 않고 그저 떠났다는 말이 될듯하다. 아니라면, 함께 흙으로 돌아갔다면, 살아있어야 마땅하다. 왜? 그 힘으로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생명 활동이 있는 형체. 곧 유기물이 그 생명 활동을 돕던 다른 물질이 변(이탈. 화학적 변이變異)했을 때 그 본래의 생명 활동이 정지된 것을 죽었다고 한다면 그를 죽게 한 물질은 함께한 생명체가 살아가는 삶의 원인이 될 터이니 그게 소멸하지 않는 한 살았다고 보고 싶다.

산다는 말은 곧 있다(存在)는 말이라고 하고 싶다. 즉 있는 것은 모조리 살아 있는 것이다. 더 깊이, 사는 것은 숨 쉬고 움직이고 먹고 싸고 생각하는 것으로 한정한다면 그 의미가 한정적이라는 생각이다.

여러형태의 존재에서 유독 움직이는 것만 산다는 것이 아님은 너무나 명백하다. 미생물, 달걀, 누에고치, 동식물의 씨앗(이하 정지된 생물), 모두 우리(사람)가 산다는 의미의 사는 것이 아닐진대 우리 인간이 사는 것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은 역시 아주 작은 의미의 삶이라는, 되돌아가는 이치가 될듯하여 달리 생각해보는 것이다. 무기물의 화학적 변화 또한 본래의 원소가 다르게 변하니 활성이라고 보면 같은 맥락인 것 같다.

이렇듯 움직이지 않는 생물이 적절한 환경에서 움직이게 될 때 살아있다고만 한다면 그 활동 전에 부동의 상태로 있으면서 살아 있다가 살아나는 것이 되거나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 되므로 삶과 죽음은 선을 그어 가를 수가 없어지는 것 같다. 그래서 산다는 뜻이 우리가 말하는 사람 기준의 말에서 한정하는 극히 협의 말이 될 수밖에 없다.

죽음은 곧 삶이다.
사람의 몸에서 이탈하는 그 무엇, 동물이 정지된 형태에서 움직이게 되는 호상의 관계, 이는 삶과 죽음의 형태적 바뀜의 일관된 진행에 다름 아닌 것으로 보인다.

사람도 물질화합(化合), 변이(變異)와 또 다른 생명 유지의 필요요인이 있다고 보인다. 곧 보이지 않는 힘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 몸을 구성한 물질적 원소를 모두 모아 사람을 만들 수 있어야 이 생각을 뒤엎을 수 있을 것이기에, 육체 이외의 비 물질이 있다고 하겠다. 이 물질이 우리의 죽음을 이은 새 삶이 되어 마땅하다. 죽는다는 말 곧 인간만이 쓰는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면 삶의 본령이 한없이 넓어지고 무한 기쁨의 장으로 이끌린다.

죽고 사는 것은 모두 존재의 다른 표현이다. 삶도 죽음이고 죽음도 삶이다. 있음이 삶의 전부다. 그 형체는 극히 작은 먼지이거나 형체를 알 수 없는 화학적 비 물질일 것이다.

우주적 공간이 나를 품고 내가 우주의 한 부분임을 알고 생명의 터를 넓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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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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