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지겹든 무더위도 풀이 꺾이고 결실의 가을철이 돌아왔다.
가을철 산 밤이 익어 떨어질 때가 되었나 보다.
며칠 전 등산을 가다가 문득 지금쯤 밤이 익을 때가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운 마을 공장 뒤에 밤나무 몇 그루가 있다. 거기에 가보기로 했다. 아직도 철이 일러서 밤송이가 나무에서 떨어질 생각이 없나 보다. 그러나 그중 한 나무는 조생종인지 밤알이 떨어져 있었다. 아무도 밤 주을 생각을 못 했는지, 올가을에는 내가 첫 손님인가보다. 꾀 많은 밤알을 주웠다. 이때 공장 아주머니가 나와서 언덕 밑에서는 밤을 주워도 공장 뒤 언덕에 있는 밤은 줍지 말라고 했다.
공장을 임대해서 사용하면서, 자기 땅도 아니면서, 밤나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공장 뒤 언덕이라야 담을 쌓거나 철조망을 친 것도 아닌, 완전 공터 인대도 영유권 행사를 하고 있었다. 이날 나는 밤을 꽤 많이 주워서 흡족히 돌아왔다.
이제 밤철이 되었나보다 생각하고, 또 산에 밤 주스로 갔다. 아직 철이 되지 않아서 허탕을 치고 돌아오다가 공장 뒤 밤나무 밑에서 밤을 몇 개 주웠다. 어제 다 주었기 때문에 하루 사이 떨어진 밤이 몇 개 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려고 공장 뒤 언덕 위로 올라왔다. 거기에 알밤 몇 개가 떨어져 있었다. 무심코 그 밤을 줍고 있는데 공장 아주머니가 나타났다. 여기 있는 밤은 줍지 말라고 했는데 줍는다고 막 화를 내는 것이다.
나는 민망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알밤 몇 개에 유혹을 물리치지 못해서 저 아주머니를 화나게 한 것을 생각하니 참으로 후회막급이다. 주운 밤을 되돌려 주고 싶지만, 아주머니가 화를 더 낼 것 같아서 아무 소리도 못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면서 생각하니 아직도 내 마음에 욕심이 가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나를 에덴동산에 세워놓고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면 선악과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따 먹은 것과 다름이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니 한없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 나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알밤 몇 개의 유혹을 떨쳐 버리지 못한 나 자신에 심한 절망감을 느꼈다. 앞으로는 밤톨 한 알이라도 욕심을 내지 않기로 마음속 다짐을 했다.
그런데 또 한 번 나를 비참하게 만든 사건이 일어났다.
등산길 도중에 빈집이 하나 있다. 이 집 마당에는 큰 밤나무 한그루가 서 있다. 이 나무에는 어른 주먹보다 더 큰 밤송이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이 밤송이가 익어서 땅에 떨어지면 달걀만 한, 엄청나게 큰 밤이 떨어진다. 운이 좋으면 집 앞을 지나다가 길에 떨어져 있는 이 밤 한 알을 얻을 수가 있다. 너무나 탐스러운 알밤이다. 그런데 어제 그 집 앞을 지나다 무심코 그 집 마당을 보니 그 큰 밤이 세 개나 떨어져 있었다. 순간 담을 넘어 들어가서 저 밤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얕은 곳의 담으로 가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발걸음을 돌렸다.
아무리 빈 집이라고는 해도 엄연히 담이 있고 대문에 빗장이 걸려 있고 검둥이 강아지가 그 집 마당에 살고 있고 또 주인이 며칠에 한 번씩 검둥이 사료를 주려 들리곤 하는 집이다.
무론 이 집 담장은 아주 낮아서 동리 아이들이 마음대로 넘어 다니며 밤을 주워간다.
대문에 걸린 빗장도 손으로 열면 얼마든지 열 수 있다. 사실상 개방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나이 지극한 사람이 남의 집 담을 넘어 그 집 마당에 있는 밤을 주워갔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나라는 사람이 참으로 한심하게 느껴졌다.
한편 사람이 욕심을 버리고 무 소유욕의 상태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실감케 하였다.
/예종규 -원로 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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