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풍요하면서도 쓸쓸하다는 점에서 모성애와 많이 닮아있다.
봄과 여름이 합일을 최종목표로 하는 이성 간의 뜨거운 사랑을 닮았다면, 가을은 별리(別離)를 최종목표로 하는 모성애 같은 계절이다.
한없이 자애롭지만 결국 분리로써 완성되는 쓸쓸한 사랑이다.
그러고 보니 사방에서 이별의 소리가 들려온다.
말 못 하는 초목들조차 가벼이 손을 흔들며 이별을 단행한다.
어떤 나무는 벌써 나체로 서서 저 매서운 동토와 찬바람을 홀로 맞을 태세를 하고 있다.
성급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이때쯤이면 누구나 자신을 돌아보고 불현듯 나이를 떠올려 보게 된다.
그리고 쓸쓸함에 젖는다. 사람들은 나이가 사람 안의 불꽃을 꺼뜨린다고 생각한다.
괴로움을 네 몸처럼 귀하게 여기라는 말이 있지만, 이 가을, 외로움을 네 몸처럼 귀하게 여기라고 말하고 싶다.
외로움은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향기로운 아픔이다.
진실로 외롭지 않고 무엇을 할 수 있으랴.
모든 창조가 외로움을 태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나는 외로움 부자. 그대보다 더 많이 가진 거라곤 이 풍성한 외로움뿐이라오.”
나는 오늘 이렇게 자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사람들은 외로움을 몹시 두려워하고 싫어한다.
정신이건 육체이건 무리 속에 있어야 안도를 하고, 바쁘고 빠르지 않으면 이내 불안해지는 고약한 병에 걸려버렸다.
호기심과 열정 대신 안일에 길들며 모험이나 고립 대신 군집을 이루는 철새가 되어 어울려 패거리를 만들며 쉽게 살고 싶어 한다.
그래서 세상은 더욱 혼란해졌고 시끄러워졌고 황폐해졌다. 사람들은 더욱 외로워졌다.
건성으로 모였다 흩어지는 가운데 무슨 진정한 꿈과 사랑이 깃들 수 있을까.
이 가을에는 무엇보다 표표하게 불어오는 가을바람 소리에서 진정한 외로움을 느끼고 홀연히 떨어지는 나뭇잎을 빛나는 스승으로 삼아보아도 좋을 것 같다.
지난여름 그토록 붉고 향기로웠던 꽃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시간과 존재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되물어보는 것이다.
우수의 여신 쿠라는 어느 날 너무 쓸쓸해서 냇가에 앉아 자신의 형상을 닮은 아기를 진흙으로 빚는다. 이 진흙의 형상에 주피터가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는데 결국은 아기의 육신인 흙을 빌려준 대지의 신과 영혼을 불어넣어 준 주피터가 서로 아기의 소유를 주장하기에 이른다.
심판관이 이렇게 심판을 내린다.
“이 아이에게 영혼을 부여한 주피터여, 아기가 죽은 후에 그 영혼을 되찾아가라.
그리고 대지의 신은 아기가 죽은 후에 그 육신을 가져가라.
그러나 어미인 쿠라여, 이 형체에 목숨이 붙어있는 한 이 아기를 그대에게 맡기노라.
이 어린것은 무덤에 들어가는 날까지 너를 닮아 매일 시름에 잠기리라.”
흙(humus)으로 만들어진 이 형체는 인간(homo)이란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고 흙으로 돌아가는 순간까지 우수에 잠기게 되는 이야기이다.
우수는 시간 안에 존재하는 인간의 숙명이요, 외로움은 인간의 엄연한 권리인 것이다.
유목민은 길을 떠날 때 가죽 허리띠 하나를 가지고 떠난다고 한다.
먼 길을 가다 허기나 외로움이 오면 단호히 그것을 졸라매기 위해서다.
허기를 아무 음식이나 구걸해서 때우지 않고 외로움을 쉽게 장터에서 해결하지 않고 굳게 졸라매는 유목민의 이야기는 참으로 상징적이다.
마지막 가을 햇살에 또 한 잎 낙엽이 진다.
낙엽은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아니 좀 더 외롭고 가벼워지라고 소리치고 있다.
우수의 여신 쿠라의 손으로 빚은 인간이 지상에서 외로운 것은 당연하며, 그 고독의 힘이 아니면 진정한 생명과 창조를 결코 만날 수 없다고 속삭인다.
저만치 시간을 읽을 줄 모르는 철부지들이 나무 아래 수북이 쌓였다가 찬바람에 우르르 쏠려간다.
그것이 슬퍼서 어미인 쿠라가 지금 창밖 가득히 우수의 눈빛으로 떨고 있다.
/ 문정희-시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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