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자료

깨어있는가

외통 2023. 5. 15. 08:38

글 찾기 ( 아래 목록 크릭 또는 왼쪽 분류목록 클릭)

외통궤적 외통인생 외통넋두리 외통프리즘 외통묵상 외통나들이 외통논어
외통인생론노트 외통역인생론 시두례 글두레 고사성어 탈무드 질병과 건강
생로병사비밀 회화그림 사진그래픽 조각조형 음악소리 자연경관 자연현상
영상종합 마술요술 연예체육 사적跡蹟迹 일반자료 생활 컴퓨터
영혼과 의식은 깨어있는가

봄 수업을 하고 난 며칠 뒤, 한 아이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올봄 수업의 주제는 ‘내 안의 나에게 안부 묻기’였다. 그렇다고 그 주제가 문자 그대로 아이들에게 전해진 것은 아니다. 책상 위에 있는 것들을 내려놓게 하고 대신 눈처럼 흰 종이 한 장의 여백을 아이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그것을 암시했을 뿐이다. 봄 수업은 의심 없이 달리는 시간을 잠시 멈춰 세우는, 머뭇거리게 하는, 그런 효과를 노려보는 수업이다. 느닷없이 교과서를 교실 바닥에 내려놓게 하는 수작부터가 그렇다.

-요즘은 너무 좋은 말을 많이 들어서 귀가 행복합니다. 정말 좋은 노래를 들었을 때처럼 말이에요. 그래서 그런지 말도 가려서 하게 되고, 손에서 놓았던 책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책장을 한장 한장 넘기는 느낌도 다시 찾았고요. 느긋함을 맛볼 수 있어 즐겁습니다. 선생님의 ‘네 안의 너 잘 있냐’는 글을 읽고 놀랐습니다. 어려운 말도 아닌데 우리는 그런 말 쓰지 않잖아요. 더군다나 안부까지 전하라니. 뭔가가 와닿는 게, 내 안의 나라는 말이 참 멋지게 생각됐습니다-.

이 편지의 주인공은 전년도 성적이 최하위였다. 1학년 때 수업에 들어간 적이 있어서 당차고 총명한 아이로만 기억하고 있던 나로서는 그것이 얼른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학기 초 첫 담임 면담 때 넌지시 물어보았다.

“꼴찌는 하려고 해도 잘 안되는 건데 넌 용케도 그걸 해냈구나. 혹시 무슨 일이 있었으니”

그 아이는 공부를 하지 않았다고 말하며 그저 겸연쩍은 표정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나는 뭔가 잡히는 것이 있어서 이렇게 다시 물어보았다.

“내가 보기에 넌 자의식이 강한 아이야. 네 생각과 주장이 있다는 말이지. 선생님도 좀 그런 편인데, 그런 사람은 강압적인 것은 딱 질색이거든. 혹시 너도 그러니?”

“예. 맞아요. 저도 강압적인 것이 제일 싫어요. 사실은 그래서 공부하고 싶지 않았어요. 물론 제 잘못인 줄 알지만….”

본인의 희망과 자유의사에 따라 하게 돼 있는 자율학습이나 특기·적성 교육이 학교 측의 무리한 요구와 기대로 인해, 혹은 담임선생님의 성향에 따라 강제성을 띠기도 한다. 이런 경우 이미 거기에 길들어 있는 대다수 아이는 속으로만 불만을 가질 뿐 그냥 넘어가기가 쉬운데, 이 아이는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한 어떤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그 현실의 담이 너무 높아 자신에게 공격을 가한 셈이 되고 말았지만. 그날 나는 이런 말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네 인생은 네 거야. 네 인생을 다른 사람이 좌우하게 하지 마. 지금까지는 그런 셈이잖아. 그동안 까먹은 거 보충하려면 남들보다 세배는 더 열심히 해야겠다. 그렇지?”

그 후 며칠이 지나 봄 수업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날 그 애가 쓴 봄 편지 어느 한구석에는 알아보기 힘든 깨알 같은 글씨로 마치 독백처럼 써놓은 글귀가 눈에 띄었다.

‘며칠 전 담임선생님이 나에게 자의식이 강한 아이라고 한 말은 듣기가 싫지 않았다. 그렇다. 나는 건방지고 내 뜻대로만 하려는 이기적인 아이가 아니라 내 주장과 내 생각이 있는 자의식이 강한 아이다….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다’

나는 이 글을 읽고 한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담임의 말 한마디에 자기 생을 걸어버리는 아이들. 그들에게 교사의 입에서 발음되는 긍정의 언어는 얼마나 소중한가. 여러 형태의 사랑이 존재한다고 해도 나마저 그를 수용하지 못하는 무용한 사랑을 했다면, 어떤 선입견 때문에 그 아이의 진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면, 교사의 잣대만을 가지고 그 아이의 삶을 재단하려 했다면 그의 학창은 얼마나 어둠뿐이었을까.

내 안의 나에게 안부를 물어보는 일은 하루라도 걸러서는 안 되는 교사의 일이 아닐까 싶다. 지금 의심 없이 가고 있는 길에 느닷없이 의문의 눈길을 던져보는 일 말이다. 나는 지금 안녕한가. 아이들을 만나는 나의 영혼과 의식은 깨어있는가.

/ 안준철 (전남 순천 효산고 교사) 경향신문-시 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