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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

외통 2023. 4. 13.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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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

한 사내가 우연히 퇴근길에 돈을 주웠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역 입구 계단을 내려가다가 뭔가 발에 툭 채는 것이 있어 보았더니 지갑이었다. 그는 얼른 지갑을 주워 양복상의 안주머니 속에 넣고 재빨리 계단을 내려갔다. 갑자기 남의 물건이라도 훔친 것 같아 아까와는 달리 계단을 거의 뛰어 내려가다시피 했다.

그러나 막상 표를 끊고 개표구를 빠져나가려고 하자 얼른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지갑을 잃어버린 사람이 지금쯤 두리번거리며 지갑을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다시 지갑을 주웠던 장소로가 보았다. 급히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만 있을 뿐 아무도 지갑을 찾는 사람은 없었다. 혹시 좀 더 기다려 보면 지갑 주인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싶어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어 보았으나 누구 하나 지갑을 찾으러 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제야 그는 은근히 마음을 놓았다. 잃어버린 물건이란 어차피 누가 주워 가도 주워 갈 것인데 내가 주워 가면 어떠랴 하는 생각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는 ´만남의 장소´라고 쓰인 나무 의자에 앉아 슬며시 지갑을 꺼내 보았다. 지갑은 까만 고급 가죽 지갑으로, 그 속엔 10만 원짜리 자기앞 수표 두 장과 만 원짜리 지폐 몇 장이 들어 있었다. 지갑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명함이나 주민등록증, 운전 면허증 따위는 없고 그저 돈만 달랑 들어 있었다.

´이건 정말 행운이야. 행운의 여신이 나를 도와준 거야. ´ 그는 속으로 가만히 소리쳤다. 어젯밤 돼지꿈도 꾸지 않았는데 이게 웬 횡재냐 싶었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데 내가 이걸 마다할 리가 없지. 그래도 난 지갑을 돌려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는 스스로 그 지갑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곧장 집으로 퇴근하려던 생각을 바꾸어 친구한테 전화를 걸었다.

˝야, 기태야, 퇴근 안 하냐? 내가 술 한잔 살 테니까 만나자. 내가 그쪽으로 갈까? 북창동? 그래, 그래, 북창동 입구에 있는 커피숍에서 일단 만나자.˝

기태는 다방에 먼저 나와 있었다. ´구두쇠 같은 네가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 술을 다 산다고 그러냐´하는 표정으로 기태가 빤히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그런 기태를 창동 갈비, 집으로 데리고 갔다.

˝보라고. 이 돈 이거, 조금 전에 길에서 주운 거야.˝

술이 몇 순배 돌자 그는 주운 돈 자랑부터 먼저 했다.

˝오늘은 정말 재수가 좋았어. 가끔가다가 이런 횡재수도 있어야 살맛이 나는 거야. 돈이란 사람이 직접 찾아 나서서는 안 되고, 이렇게 재발로 사람을 찾아와야 하는 거야. 이거, 주운 돈으로 먹으니까 술맛이 아주 좋군그래.˝

기태가 멍하니 부러운 듯이 쳐다본다

그는 더욱 신이 나서 떠들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쯤이었을 거야. 우리 동네 다리 위에서 돈을 한번 주운 적이 있어. 지금 돈으로 치면 한 몇십만 원쯤은 될 거야. 난 학교에서 배운 그대로 가까운 파출소에 갔다가 주면 주인한테 돌려줄 수 있다고 배웠거든. 그래서 파출소 순경한테 돈을 주었어. 순경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어디서 주웠느냐, 이름은 뭐냐, 어느 학교 몇 학년 몇 반이냐 하고 일일이 묻고 적더군. 그래서 난 기다렸지. 이런 착한 학생이 있다고 학교로 연락이 와서 틀림없이 선생님께 칭찬을 받을 줄 알고 말이야. 그런데 그러고는 그만이야.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 소식도 없는 거야. 난 다시 파출소를 찾아가서 그 돈을 어떻게 했느냐, 정말 주인을 찾아 주었느냐 하고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어. 그렇지만 난 순경들이 그 돈을 어떻게 했는지는 늘 궁금했어. 차차 나이가 들고 세상 돌아가는 걸 알게 되면서부터 난 순경들이 그 돈을 주인에게 돌려주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지만 말이야. 그 돈을 그냥 내가 갖는 건데, 지금도 그때 일만 생각하면 후회가 돼. 아마 순경들은 이게 웬 떡이냐 싶어 그 돈으로 자기들끼리 술 먹고 치웠을 거야. 아예 처음부터 주인을 찾아 돌려줄 생각조차 않았을 거야. 그래서 내가 지금 그때 일을 보상받기 위해 이렇게 또 돈을 주웠는지 몰라. 나로서는 정말 기분 좋은 일이야."

그는 안주 먹는 일에는 크게 신경도 쓰지 않고 술잔을 홀짝거리며 내내 살맛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음날, 기태는 자기도 한번 돈을 줍는 기쁨을 맛보고 싶었다. 마침 토요일이어서 일찍 퇴근하게 된 그는 돈을 줍기 위해 이리저리 거리를 쏘다녔다.

특히 돈이 떨어져 있음 직한 버스 정류장이나 택시 정류장, 지하철 매표구 입구 등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밤늦게까지 돌아다녀도 길 위에 떨어진 돈이라고는 없었다.

다음날 일요일에도 가족들과의 나들이 약속까지 취소하고 거리를 쏘다녀 보았으나 그 어디에도 10원짜리 동전 하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는 그런 자신이 우스웠다. 더는 우스워지기 전에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왕 이렇게 나선 김에 돈을 줍는 기분만이라도 한번 맛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 호주머니 속에 든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길에 던져 놓고 남의 돈을 줍는 척하고 집어 보았다.

그러나 별로 신통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래도 몇 번이나 그 짓을 되풀이해 보았다. 역시 신통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자칫 잘못하다가는 다른 사람이 먼저 주워가 버릴까 염려되었다.

염려 끝에 그는 한강 강턱으로 나갔다.

마침 저녁때라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팔짱을 끼고 데이트를 하는 남녀 몇 명과 무심히 흘러가는 유람선만 눈에 띄었다.

그는 그곳에서도 자기 돈을 떨어뜨려 놓고 줍는 일을 되풀이해 보았다.

혹시 무슨 특별한 기분이라도 드나 했으나 역시 별다른 기분이 들지 않았다.

도무지 싱겁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번이 마지막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해보고 그만두자´ 하는 생각을 하고 다시 돈을 떨어뜨렸다.

그런데 그때 강한 바람이 획 불어왔다.

떨어뜨린 돈이 강물 쪽으로 급히 굴러갔다.

그는 얼른 돈을 주우려고 달려갔다.

그러나 그때 다시 한번 획 강한 바람이 불어 돈이 그만 강 물속으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 작자미상 -시 마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