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고민을 털어놓았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데, 그 사람 마음을 도무지 모르겠다고.
제기랄, 그따윈 집어치우고, 나와 사랑을 하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여느 때처럼 난
˝시간을 두고서 잘 생각해 결정하세요. 형˝
하며 있는 대로 점잖고 사려 깊은 척, 위선의 가면을 쓰고 웃었다.
늘 그런 식이었다.
그를 알아 온 지난 2년 동안 늘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려고 태어난 사람처럼 난 그의 말이라면 뭐든지 사사건건 따지려 들었고, 그의 말꼬리를 잡고 배배 꼬았다.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치게 될 때도 난 절대 먼저 아는 척 안 했다.
하나도 반갑지 않은 것처럼 표정 관리에 힘썼고, 그보다는 그의 주변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조금도 관심이 없는 그들의 얘기에 너무 재미있다는 듯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가 들으라고, 더 크게 깔. 깔. 깔.
난 형한테 관심이 없어. 깔깔깔.
보라고. 이렇게 형 외의 다른 사람 얘기에 더 행복해서 웃고 있잖아!
깔. 깔. 깔. 깔. 깔. 깔.
그러나 그 오만스러운 웃음소리에도, 제발 질투 좀 하라는 그 웃음소리에도 그는 빙긋이 웃으며 말할 뿐이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니? 나도 한번 들어보자.˝
그 소리에 난 저 혼자 부풀어 오르던 풍선이 바람 빠지는 것처럼 그저 피식 웃고 말았다.
어이구, 이러니 내가 이 사람을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어!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처음 만난 그날부터 그는 학교 후배라며 날 무작정 아껴주었다.
그 한없는 친절함에 나의 사랑은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후 계속되는 나의 수작에도 전혀 질투하지 않는 그 친절함을 보면서 난 한없는 그 친절함이 바로 나에 대한 한없는 무감정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나의 사랑은 절망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어느 날, 그는 어학연수를 간다고 했다.
기간은 1년이었다.
그 기간 그 누군가에 대한 감정을 정리해 보고 싶다고 했다.
그때까지도 변하지 않는다면 정식으로 프러포즈도 할 거라고….
그 말은 곧 나에게 사형 선고였다.
완벽히 고래 싸움에 새우 등짝 터진 꼴이었다.
그 잘난 누군가 때문에 나는 원치도 않던 생이별을 하게 된 셈이었다.
그의 마음은 어떻게 해볼 수 없다 쳐도 이제 그의 모습마저 볼 수 없다니.
흑. 흑. 해삼, 멍게, 말미잘, 불가사리….
아! 더러운 내 사랑.
그가 떠나던 날….
난 그의 친한 무리 속에 뻘죽하게 서서 그를 배웅했다.
그는 우리에게 이별의 선물을 나눠 주기 시작했다.
˝야, 너 겨울이 생일이지?
그땐 내가 여기 없으니까 특별히 넌 생일 선물로 준비한 거야.
생일날 꼭 풀어봐! 크기는 작아도 이게 젤 비싼 거다.˝
사기꾼처럼 그가 빙긋이 웃었다.
거짓말…. 제일 비싼 거라고? 흥!
크기가 작으면 작아서 미안하다고 해.
내가 크기 갖고 뭐 섭섭해할 것 같아?
속으론 그랬지만 내심 섭섭했다.
다른 사람들 것에 비하면 내건 진짜 좁쌀만 했으니까.
그게 아닌 줄 알면서도 선물의 크기가 마치 우리 각자에 대한 그의 애정의 크기와 비례하는 것만 같아 섭섭했다.
아주 많이….
그가 떠나고 다른 사람들이 커피나 하고 가자는 걸 집에 급한 일이 있다고 빠져나왔다.
택시를 타고 시내로 나올 때까지도 그냥 그렇던 가슴이 파란 하늘을 가로지르며, 유영해가는 비행기를 보자 그만 울음을 토해냈다.
엉엉….
지랄 같고.
병신같고.
바보 같은.
내 사랑.
몇 달 뒤. 그때 배웅했던 무리 중의 한 사람으로부터의 전화가 걸려왔다.
˝저. XX인가 죽었대.˝
암벽 등반을 하다 당한 실족사라고 했다.
그 어이없음이라니….
´어학연수´와 ´암벽 등반´이라는 절대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단어의 함수관계에 아연실색하며 하마터면 전화기 저편 상대에 대고 ´하하하´ 폭소라도 터뜨릴뻔했다.
제기랄!!
이후, 난 그를 잊기로 작정했지만 그게 또 잘되지 않는 거였다.
차마 고백하지 못했던 말들은 내 맘속에 똬리를 틀며, 그 도도하던 자존심에 상처를 긋기 시작했다.
내 생일날이 돌아왔다.
아침부터 창가엔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첫눈이었다.
길조라며 친구들은 축하한다고 부어라 마셔라 좋아들 했지만 내 마음은 온통 내 방 책상 맨 밑 서랍 속에 놓여있는 그의 생일 선물에 가 있었다.
결국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나는 서둘러 술자리를 빠져나왔다.
만일 그가 살아 있었더라면 아마 난 오늘이 오기 전에 선물을 풀어봤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죽고 나니 그건 그와 내게 남아있는 유일한 연결고리가 되어버렸다.
그 마지막 고리를 난 서둘러 풀어 버리고 싶지 않았다.
지하철에서부터 조급했던 마음은 역에 내리자마자 날 다그쳐 뛰게 했다.
헉헉….
집으로 달려와서 방문을 열고 책상으로 달려가 맨 밑의 서랍을 열고 선물을 꺼내 들었다.
헉헉….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A.S.T.R.A라는 상표가 곱게 찍힌, 만년필이었다.
그렇게 아껴두고 기다리고 고대했던 선물이 고작 만년필이라는 게 조금 실망했고, 이제 이것으로 그와 나를 연결하는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기적이라도 바랐던 것일까?
후유….
만년필을 만지작거리자니 영화 사랑 편지의 여주인공처럼 죽은 애인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졌다.
살아생전 애인이라고….
사랑한다고 단 한 번도 불러보지 못했던 그이지만….
편지지와 잉크를 가져왔다.
만년필 뚜껑을 열었다.
순간 ´툭´ 하고 뭔가가 떨어졌다.
뚜껑 안쪽에 동그랗게 접혀있던 메모지였다.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아니, 미친년 널 뛰듯 했다.
심호흡하고.
눈을 질끈 감고.
떨리는 손으로 메모지를 펼쳤다.
감은 눈을 뜨자 너무나도 낯익은 그의 글씨체가 날아와 박혔다.
˝귀.국·하.면. 우.리. 함.게.살.자.˝
창밖엔 하염없이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 작자 미상 -시 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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