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자료

사랑의 갈등

외통 2023. 4. 12. 21:39

글 찾기 ( 아래 목록 크릭 또는 왼쪽 분류목록 클릭)

외통궤적 외통인생 외통넋두리 외통프리즘 외통묵상 외통나들이 외통논어
외통인생론노트 외통역인생론 시두례 글두레 고사성어 탈무드 질병과 건강
생로병사비밀 회화그림 사진그래픽 조각조형 음악소리 자연경관 자연현상
영상종합 마술요술 연예체육 사적跡蹟迹 일반자료 생활 컴퓨터
사랑의 갈등

그가 고민을 털어놓았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데, 그 사람 마음을 도무지 모르겠다고. 제기랄, 그따윈 집어치우고, 나와 사랑을 하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여느 때처럼 난
˝시간을 두고서 잘 생각해 결정하세요. 형˝
하며 있는 대로 점잖고 사려 깊은 척, 위선의 가면을 쓰고 웃었다.

늘 그런 식이었다.

그를 알아 온 지난 2년 동안 늘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려고 태어난 사람처럼 난 그의 말이라면 뭐든지 사사건건 따지려 들었고, 그의 말꼬리를 잡고 배배 꼬았다.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치게 될 때도 난 절대 먼저 아는 척 안 했다.

하나도 반갑지 않은 것처럼 표정 관리에 힘썼고, 그보다는 그의 주변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조금도 관심이 없는 그들의 얘기에 너무 재미있다는 듯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가 들으라고, 더 크게 깔. 깔. 깔.
난 형한테 관심이 없어. 깔깔깔.
보라고. 이렇게 형 외의 다른 사람 얘기에 더 행복해서 웃고 있잖아!
깔. 깔. 깔. 깔. 깔. 깔.

그러나 그 오만스러운 웃음소리에도, 제발 질투 좀 하라는 그 웃음소리에도 그는 빙긋이 웃으며 말할 뿐이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니? 나도 한번 들어보자.˝

그 소리에 난 저 혼자 부풀어 오르던 풍선이 바람 빠지는 것처럼 그저 피식 웃고 말았다.

어이구, 이러니 내가 이 사람을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어!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처음 만난 그날부터 그는 학교 후배라며 날 무작정 아껴주었다.

그 한없는 친절함에 나의 사랑은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후 계속되는 나의 수작에도 전혀 질투하지 않는 그 친절함을 보면서 난 한없는 그 친절함이 바로 나에 대한 한없는 무감정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나의 사랑은 절망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어느 날, 그는 어학연수를 간다고 했다.

기간은 1년이었다.

그 기간 그 누군가에 대한 감정을 정리해 보고 싶다고 했다.

그때까지도 변하지 않는다면 정식으로 프러포즈도 할 거라고….

그 말은 곧 나에게 사형 선고였다.

완벽히 고래 싸움에 새우 등짝 터진 꼴이었다.

그 잘난 누군가 때문에 나는 원치도 않던 생이별을 하게 된 셈이었다.

그의 마음은 어떻게 해볼 수 없다 쳐도 이제 그의 모습마저 볼 수 없다니.

흑. 흑. 해삼, 멍게, 말미잘, 불가사리….

아! 더러운 내 사랑.

그가 떠나던 날….

난 그의 친한 무리 속에 뻘죽하게 서서 그를 배웅했다.

그는 우리에게 이별의 선물을 나눠 주기 시작했다.

˝야, 너 겨울이 생일이지?

그땐 내가 여기 없으니까 특별히 넌 생일 선물로 준비한 거야.

생일날 꼭 풀어봐! 크기는 작아도 이게 젤 비싼 거다.˝

사기꾼처럼 그가 빙긋이 웃었다.

거짓말…. 제일 비싼 거라고? 흥!

크기가 작으면 작아서 미안하다고 해.

내가 크기 갖고 뭐 섭섭해할 것 같아?

속으론 그랬지만 내심 섭섭했다.

다른 사람들 것에 비하면 내건 진짜 좁쌀만 했으니까.

그게 아닌 줄 알면서도 선물의 크기가 마치 우리 각자에 대한 그의 애정의 크기와 비례하는 것만 같아 섭섭했다.

아주 많이….

그가 떠나고 다른 사람들이 커피나 하고 가자는 걸 집에 급한 일이 있다고 빠져나왔다.

택시를 타고 시내로 나올 때까지도 그냥 그렇던 가슴이 파란 하늘을 가로지르며, 유영해가는 비행기를 보자 그만 울음을 토해냈다. 엉엉….

지랄 같고.

병신같고.

바보 같은.

내 사랑.

몇 달 뒤. 그때 배웅했던 무리 중의 한 사람으로부터의 전화가 걸려왔다.

˝저. XX인가 죽었대.˝

암벽 등반을 하다 당한 실족사라고 했다.

그 어이없음이라니….

´어학연수´와 ´암벽 등반´이라는 절대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단어의 함수관계에 아연실색하며 하마터면 전화기 저편 상대에 대고 ´하하하´ 폭소라도 터뜨릴뻔했다. 제기랄!!

이후, 난 그를 잊기로 작정했지만 그게 또 잘되지 않는 거였다.

차마 고백하지 못했던 말들은 내 맘속에 똬리를 틀며, 그 도도하던 자존심에 상처를 긋기 시작했다.

내 생일날이 돌아왔다.

아침부터 창가엔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첫눈이었다.

길조라며 친구들은 축하한다고 부어라 마셔라 좋아들 했지만 내 마음은 온통 내 방 책상 맨 밑 서랍 속에 놓여있는 그의 생일 선물에 가 있었다.

결국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나는 서둘러 술자리를 빠져나왔다.

만일 그가 살아 있었더라면 아마 난 오늘이 오기 전에 선물을 풀어봤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죽고 나니 그건 그와 내게 남아있는 유일한 연결고리가 되어버렸다.

그 마지막 고리를 난 서둘러 풀어 버리고 싶지 않았다.

지하철에서부터 조급했던 마음은 역에 내리자마자 날 다그쳐 뛰게 했다. 헉헉….

집으로 달려와서 방문을 열고 책상으로 달려가 맨 밑의 서랍을 열고 선물을 꺼내 들었다. 헉헉….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A.S.T.R.A라는 상표가 곱게 찍힌, 만년필이었다.

그렇게 아껴두고 기다리고 고대했던 선물이 고작 만년필이라는 게 조금 실망했고, 이제 이것으로 그와 나를 연결하는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기적이라도 바랐던 것일까?

후유….

만년필을 만지작거리자니 영화 사랑 편지의 여주인공처럼 죽은 애인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졌다.

살아생전 애인이라고….

사랑한다고 단 한 번도 불러보지 못했던 그이지만….

편지지와 잉크를 가져왔다.

만년필 뚜껑을 열었다.

순간 ´툭´ 하고 뭔가가 떨어졌다.

뚜껑 안쪽에 동그랗게 접혀있던 메모지였다.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아니, 미친년 널 뛰듯 했다.

심호흡하고.

눈을 질끈 감고.

떨리는 손으로 메모지를 펼쳤다.

감은 눈을 뜨자 너무나도 낯익은 그의 글씨체가 날아와 박혔다.

˝귀.국·하.면. 우.리. 함.게.살.자.˝

창밖엔 하염없이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 작자 미상 -시 마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