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데이비스는 크리스마스면 온 가족이 바닷가 콘도에 모인다. 함께 사는 아내와 일곱 살 난 딸, 두 번째 아내와 아들 둘, 그리고 첫 번째 아내와 그가 낳은 남매를 합치면 아이 넷, 어른 넷. 모두 아홉 명의 `대가족´이 칠면조 요리를 먹으면서 한 해 동안 지나온 이야기를 하며 서로의 존재를 축복한다. 올 연말에 데이비스 생각이 난 이유가 뭘까? 주변에서 이혼하는 사람을 아주 많이 본 한 해였기 때문인 듯하다.
“그래, 그 사람이 바로 그 친구의 두 번째 남편이야.”
“그 사람은 누구의 첫 번째 아내였지….”
여기서 그 `누구´는 유명한 연예인이 아니라 그냥 얌전했던 후배나 제자들이다. 은퇴를 앞둔 교수 한 분은
“요즘 시어머니들은 아들이 이혼당할까 봐 절절맨다”
라면서 최근에 나온 가족 사회학 관련 책들을 빌려 가셨다. 요즘 시어머니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손주를 두고 며느리가 떠나는 것이라 한다.
이혼이 늘어나는 것도 시대적 현상이다. 허리를 졸라매고 어렵게 산 세대는 이혼을 하지 않는다. 이혼은 그 세대의 자녀들, 풍요의 맛을 본, 힘든 삶을 체험하지 못한 세대의 몫이다.
1970년대 미국의 이혼율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고, 2000년대 한국이 그러한 모양이다.
해체의 시대에 가족만은 해체되지 말란 법은 없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체 후 재구성을 잘해가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자유와 평화를 희구했던 히피 세대가 범했던 큰 실수는 유토피아가 금방 실현될 수 있다고 믿었던 점이 아니었나 싶다. `위선적´인 부모 세대를 비판하면서 서로의 감정에 솔직해진다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그들은 믿었다. 그들은 감정에 충실한 사랑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사랑이 식으면 헤어졌다.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입혔고, 아이들에게는 더 큰 상처를 입혔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헤어짐을 `당하였기에´ 아이답지 않게 조숙했고, 관계 맺기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거나 과도하게 집착하는 성향이 있게 되었다고 히피 세대의 아이들은 자기 세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어린 시절, 가장 친밀했던 인간관계로부터 받은 상처는 아주 오래 간다.
지금 한창 이혼하는, `이상과 열정´의 386세대는 그런 면에서 히피 세대와 비슷한 데가 있다. 자기 핏줄밖에 모르는 부모 세대를 비판하면서 정의와 평등을 노래했고, 말이 통하는 `평등한 파트너´를 만나 열렬히 사랑하고 결혼을 했다. 그렇게 맺어진 커플들이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며 헤어지고 있다.
할리우드 영화는 아직도 낭만적 사랑과 결혼을 등식화하고 있지만, 사랑하는 둘만의 관계를 원한다면 가장 피해야 하는 것이 바로 결혼이라는 것을 이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인류사를 통해 보면 결혼이라는 제도는 두 명의 사랑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두 명 이상의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있어 왔다.
`연애 상태에 있지 않으면 불안해서 못 사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연애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그들을 보면서 한심해한 적도 많지만, 요즘 나는 그들이 기특해 보인다. 그들은 해체의 시대를 살아갈 규칙과 기술을 익히고 있다. 상처를 주지 않고 헤어지는 연습을 하는 이 세대는 결혼에 좀 더 신중하고, 이혼하더라도 저는 남편, 전 아내 다 한자리에 모여서 자신들이 세상에 탄생시킨 아이의 존재를 한껏 축복하는 여유를 보여주게 될까? 부부의 헤어짐과는 무관하게 부모의 사랑은 변함없다는 사실을 아이들에게 확인시키는 기술을 갖게 될까?
추운 연말에,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 질문하며 홀로 남겨진 아이들이 없으면 좋겠다. 아이는 스무 살이 넘으면 떠나기 마련이고, 21세기의 어른들은 아이를 기른 후에도 긴 인생을 살아야 한다. `친밀성의 역동적 구조´에 대해 숙고할 때다. 개인을 위해서나 나라를 위해서나.
/조한혜정-한겨레 - 여론 칼럼-시평 -시 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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