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 시절, 나는 공부하기보다도 편지 쓰기를 좋아했다. 같은 반 친구들에게도 쓰고, 부칠 곳이 없으면 나 자신에게도 쓰고, 날마다 편지만 쓴 것 같다.
생각해보면 어리석은 일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 수 많은 편지를 왜 다 버렸던가! 지금은 쓸 수 없는 물오른 나무에 새싹이 피어나듯이 마음의 순수와 천지의 아름다움, 때로는 우울한 까닭 모를 눈물의 편지들을 왜 다 아궁이에 넣어 태워 버렸을까!
아쉬운 마음 한이 없으나, 이제 다시는 그런 편지를 쓸 수도 없고 재로 흩어진 그 편지들을 되찾을 길도 없다.
그렇게도 쓰고 싶던 편지를 나는 이제 쓰지 않는다.
그럴 만한 열정도 순수성도 없어진 것일까! 전화가 있고, 핸드폰이 있고, 컴퓨터에, 팩스에, E-메일, 인터넷이 있는 50년 뒤에 지금 세상에는 편지란 쓸 필요도 없고 읽을 시간도 없다.
50년 사이에 세상은 이렇게 변했고 스피드해 간다. 하루해가 더 짧아진 것만 같다. 똑같은 24시간의 하루건만 예전에는 그 하루가 지루하도록 길고 멀기만 했다. 梨花女專이 신촌에 있고 서울에서 기차를 타거나 걷기 전에는 가기 힘든 머나먼 거리였다. 나는 걷기를 좋아해서 계동에서부터 지금은 아현동 고개, 번화가가 되기 전. 나무와 숲과 꽃이 가득한 애기능을 넘어 갈대밭 사이로 천천히 걸어 다니곤 했다.
그때 내 마음은 공부보다도 그 자연 속을 혼자서 천천히 걸으며 맑은 하늘도 쳐다보고 가다 쉬고 싶으면 푸른 숲속에 주저앉아 시집을 읽기도 하며 마음껏 내 마음의 자유를 누리던 때였다. 오염도 없는 공기는 샘물처럼 시원했고 마음속 또한 그 하늘 끝처럼 맑고 무한대했다.
그 하늘, 그 숲속과 들꽃과 흔들리는 갈대 등이 너무 아름답고 좋아
나는 종종 이런 생각을 했다. 사람이 이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늙어서 추악한 모습으로 죽는다는 것은 얼마나 쓸쓸한 일인가?
나는 30세만 되면 죽으리라
이건 나만의 생각을 아니었다. 그때 친하게 몰려다니던 끼리끼리의 공감이었다.
세월은 흐르고 30세의 두 배를 살고도 남은 우리는 이제 건강에 좋다면 무엇이든 먹고 싶어 하는 속물들이 되어버렸다. 그렇게도 사랑하던 대자연은 오염으로 가득해지고 우리 자신 마음과 마음의 신의와 애정보다는 불신과 질투로 가득 차게 되었다
더구나 편지 같은 건 쓰지 않게 되었다.
어느 날 나는 서류 정리를 하다가 몇 장의 묵은 편지통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득히 잊고 있던 내가 받은 편지들, 나는 갑자기 그 편지들을 껴안고 옛날로 돌아간 마음으로 한 장 한 장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마음은 60여 년 전으로 돌아가 맑은 샘물 속에서 그 시절, 그 친구들이 다시 떠올랐다.
그 중, 내가 최후까지 함께 했던 선배 시인 모윤숙 선생의 편지를 다시 읽어 본다.
˝禧야,
모두가 내게서는 意味를 뺏어 간 것 같다
東京이 유령들의 사막 같다.
서울이 끔찍하더니 동경의 네온도 나에겐 아무 감명도 안 준다.
PEN이나 다른 회의와 달라 정식으로 책임지고 읽고 쓰고 대비해야 하니, 머리는 쉴 새 없고 내일은 여기 히비야 공관에서 <춘향전>을 한다고 하니 가 봐야겠다
나는 왜 이렇게 앉아 누구에게 쓰는지도 모르는 편지를 쓰는지 모르겠다. 세상에는 내 편지를 받을 사람도 없구나. 네가 받는 셈이지 …˝ 中略
이 편지 한 장에서 나는 지금도 그가 내 곁에 계신 듯 생생하게 떠오른다
우리가 떠난 후 남는 것은 편지뿐이오. 그것은 세월이 갈수록 더욱 소중한 삶의 증언이 되지 않을까 한다.
지금은 연애편지 한 장 안부 편지 한 장 쓰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일 년에 한 번 보내는 연하장에도 서명조차 인쇄로 해 버리고 누구에게 보냈는지, 어디서 온 것인지, 기억조차 희미하다.
과학과 문명이 발전하면서 인간은 완전히 기계화되고 감정조차 메말라 버렸다.
앞으로 100년 후에는 어떻게 될까?
사람은 기계화되고 감정조차 희비 애환을 가지지 못하는 식물인간이 되어 버리지나 않을까?
그러면서 100년, 200년을 산들 무엇하나!
나는 미래가 두렵다.
지금이라도 나는 내 생명 있는 한 편지를 쓰리라.
마음에서 마음으로 강물처럼 흐르는 오염 없고, 거짓 없는 편지를 쓰리라.
/전숙희- 예술원 회원·수필 - 시 마을 -
* 자료출처 : http://www.busiddol.com/letter20/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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