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생명을 사랑하는 임금님이 계셨지. 임금님의 정원에는 온갖 꽃과 나무들로 충만해 있었어. 그런데 하루는 늙은 정원사가 달려와서 수심 어린 목소리로 말하기를
˝임금님, 임금님, 큰일이 났습니다. 정원의 꽃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정원의 나무들이 말라가고 있습니다.˝
임금님이 깜짝 놀라 정원으로 달려갔어.
˝포도나무야, 포도나무야, 너는 왜 죽으려고 하느냐˝
˝임금님, 저는 없어도 괜찮은 존재입니다. 저는 열매를 맺긴 합니다만 사과나 배나 오렌지에 견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일어설 수도 없습니다. 가지에 얹히어야 덩굴을 뻗고 제대로 몸을 지탱하게 됩니다. 임금님, 저 같은 것은 없어도 되는 존재입니다.˝
임금님은 말없이 장미로 가서
˝장미야, 너는 왜 죽으려고 하느냐˝
˝임금님, 저는 열매 맺지 못함을 슬퍼합니다. 꽃이 시들면 저는 가시덩굴에 불과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저를 혐오합니다. 그래서 저는 죽기로 했습니다˝
장미는 임금님 정원의 여왕이었지. 그의 외모는 화려하고 향기는 매혹적이었으며 그의 자존심은 그 몸의 가시보다도 더 도도하게 솟아있었어.
그러던 장미의 생명에 대한 포기는 임금님을 한없이 절망하게 했단다.
˝전나무야, 너까지 왜 이렇게 내 속을 속이느냐?˝
수려한 가지를 마음껏 뻗고 잘생긴 이마를 들어 구름을 바라보면서 사시사철 한결같이 성실하던 전나무에서 다가간 임금님은 한숨을 쉬면서 물었어.
˝임금님, 저야말로 쓸모없는 존재입니다. 제가 꽃을 피울 수 있습니까? 아니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공연한 몸뚱이만 가지고 발아래 풀들만 괴롭힙니다.˝
‘아!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임금님의 마음은 괴롭다 못해 노여웠단다.
˝그것은 겸손이 아니다. 그것은 오만이다. 죽는 것이 소원이라면 모두 죽어도 좋다.˝
‘생명을 사랑하는 임금님이지만 생명을 우습게 여기고 살기를 거부하는 것들까지 사랑할 수 없었구나!’
힘없이 궁중으로 돌아오는 임금님의 뒷모습은 슬픔과 고통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뭐란 말인가. 층계의 돌 틈바구니를 비집고 건강하게 솟아오른 꽃 대롱이 정오의 햇살 아래 황금색 꽃잎을 활짝 피는 꽃. 그것은 민들레가 아닌가.
이번에는 임금님이 이렇게 말했지
˝민들레야, 민들레야, 다들 죽겠다고 하는데 너는 왜 살고자 하느냐?˝
˝임금님, 저는 민들레입니다. 민들레 외에 다른 것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장미가 아닌 것을 한탄하지 않습니다. 포도나무처럼 열매 맺지 못하는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전나무처럼 사시사철 푸르게 서 있지 못함을 슬퍼하지 않습니다. 나는 다름 아닌 민들레이기 때문입니다. 임금님의 정원 한 귀퉁이 돌층계 틈에 비좁은 장소가 저의 영토입니다. 저는 여기서 세계로 나아갈 꿈을 꿉니다.˝
이렇게 말하는 민들레꽃 위에 해는 더욱 찬란하게, 해는 더욱 풍성하게 빛을 붓고 있었어
˝훌륭하구나! 민들레야, 장하구나! 민들레야. 네가 아니었으면 나는 어리석은 임금이 될뻔했구나.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생명 하나를 잊고 살 뻔했구나. 나는 나의 정원을 민들레로 채우고 싶다. 내 소원을 들어다오.˝
이 이야기는 아마도 여기쯤에서 끝이 나야 할 것이다. 장미와 전나무들은 정말로 살기를 그만두었는지 어땠는지 그 후의 소식이야 어떤들 어떠하랴.
작은 민들레의 자긍(自矜) 하는 마음이 유유한 향내로 온 정원을 불 밝혀 부활하게 하 는 것을. 남들이 보기에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들꽃에 불과하지만, 제힘으로 자신을 광채 나게 하여 죽어가는 정원의 마지막 파수꾼이 되는 민들레의 승리가 참으로 아름답고 눈물겨운 것을.
타인 백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고 하여도 본인인 나 스스로가 긍지를 버린다면 백 사람의 사랑이 무슨 쓸모가 있겠느냐? /이양하 -˝영에서 하나까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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